이건영 < 아주대 교수 / 환경도시공학 >

세모의 분위기는 으레 글루미(gloomy)하다.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구나 하는 감회에는 뜻대로 되지 않은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는 법이다.

그래서 송년회다 망년회다 하며 모여서 서로 술잔에 세월을 채워 마셔버리며
지난 일들을 잊자고 떼를 쓰는 것이다.

망년회의 풍습은 어디서 온 것이기에 이처럼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명칭이
붙었을까.

하지만 "망각없이 행복이 있을 수 없다"고 앙드레 모루아는 말하지
않았던가.

새천년을 맞는 세기말의 세모에 서서 버리고 가야할 우리 사회의 유산들을
정리해 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첫째로 우리가 버려야 할 유산은 사회 전반에 팽배한 정치중독증이다.

경제도, 사회도, 행정도, 심지어 문화도 모두 정치논리에 의해 좌우되고,
모든 분야가 정치에 오염되어 있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정치의 범람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는 이제 바닥을 친 지 오래이지만, 종합지의 경우
그래도 정치는 대부분 1면의 톱이다.

왜일까.

그것은 "정치"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가 곧 우리사회를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정치는 정경유착의 단단한 끈으로 얽어서 경제를 지배해 왔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여러 형태의 "길들이기"를 통해 관치경제는 심화되었다.

모든 분야가 자율의 힘을 잃고, 정치의 구호에 따라 움직여 왔다.

다시 말해 우리 현실은 정치가 곧 권력의 길이고 부의 길이고 모든 것의
길이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의 과잉과 집중현상은 정권이 바뀌면서 점점 심화되었다.

그래서 정치검찰은 물론 대학교수도, 소설가도, 사업가도, 앵커도 모두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정치판에 조준하고 있다.

신당에 나선 면면들을 보라.

전 세계가 자율을 바탕으로 세계화하고 있는데 세기말까지 우리사회는
"싸가지없는" 정치에 목줄을 매달고 있는 형상이다.

두번째로 버려야 할 것은 우리경제의 투기병이다.

우리 경제는 체질적으로 투기라는 마약이 있어야 제길을 가는가 보다.

우리 경제의 성장디딤돌은 땅투기에서 시작되었다면 과장일까.

광란의 70년대, 80년대의 땅투기로 해서 졸부와 못가진 자가 갈라지고,
엄청나게 오른 땅값이 투자자본이 되어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한 세기를 마감하는 지금은 벤처와 코스닥시장의 "묻지마"식의 투기가
열병과 같다.

요즘의 경제회복 기운은 적당한 투기를 조장한 정부의 마약처방과 증시에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의 과소비가 어울려서 만들어진 거품경제라는 회의론
도 있다.

여기서 빈부간의 소득격차는 넓어지고, 황금만능주의, 한탕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계급문화가 피어나는 것이다.

이같은 천민자본주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한국병이다.

경제도 정의로운 길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만년부실병이다.

금년 한 해 떠들썩했던 "옷로비사건"은 우리가 진실을 호도하고 적당적당히
봉합하는데 익숙해 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나왔던 거창한 정치, 사회 각 분야의 개혁공약이나
IMF로 인한 구조조정의 구호는 어디로 갔는가.

이런 식의 일회성 진통제 같은 정책이 너무나 많다.

지금은 적당히 봉합하고,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다.

시작과 끝과 매듭, 그리고 책임한계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이것이 불신의 씨가 되고 정부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하드웨어도 마찬가지다.

멀쩡히 서 있는 건물이나 다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기초와 속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씨랜드에 화재가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덧 우리는 사고왕국이 되었다.

항상 기초가 부실하고 적당적당히 포장하고 진실은 적당히 숨겨두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넷째로 우리가 꼭 버리고 가야할 것은 골 깊은 갈등구조일 것이다.

천여년 전의 삼국지를 보는 것 같은 골 깊은 지역 할거주의는 이미 도를
넘었다.

시행하지도 않은 노동법조항을 고치려다 터져나온 노사갈등도 경제의 짐이
되고 있다.

학연 지연 혈연 등 뿌리깊은 배타주의와 패거리문화도 우리사회의 치부이다.

게다가 구태의연한 정치행태는 갈등구조를 해소하기보다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싹쓸이 인사와 한풀이는 불화와 반목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번 선거에서도 삼국지현상은 더욱 심화되지 않겠는가.

새 세기, 새 밀레니엄에 우리는 선진국가로 부상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멍에와 지저분한 유산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
발걸음은 무거울 것이다.

< gyl@madang.ajou.ac.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