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석제 ]

<> 60년 경북 상주 출생
<> 연세대 법학과 졸업
<> 8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궁전의 새'', 소설집 ''새가 되었네''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아빠''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홀림'', 시집 ''낯선 길에 묻다''
<>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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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눈이 핑핑 돈다.

전자책이며 디지털신문이며 하도 많이들 떠들어대니 난 좀 딴 얘기를
해야겠다.

젊은 친구,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나는 사업을 디자인하는 이 직업에 30년
넘게 종사해 왔다.

지난 세기, 곧 20세기에만 해도 오래도록 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장인이니 명인이니 해서 대접을 잘 해줬는데...

대물림을 해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은 적도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난 세기의 1백분의
1만큼도 존중받지 못한다.

점쟁이가 제 앞길 모른다던가.

사실은 내가 바로 그런 짝이다.

남의 사업 디자인은 수없이 해주면서 나 스스로는 단 하나의 일, 곧 사업
디자이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외길을 걸어왔다.

대물림하는 명인들이 많으면 살지 못하는 시스템 속에서 정작 나 자신은
한 세대를 넘는 시간동안 이 일을 하고 있다.

이때까지 내가 전면적으로 사업 디자인을 해줬든 아니면 부분적으로 조언을
해줬든 간에 나를 만나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은 수십만 명이
넘는다.

그 사람들 중에는 알 만한 대사업가가 적지 않다.

정치가, 운동선수, 프로그래머, 예술가들도 많다.

사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장사나 기업이 사업인 것은 물론이고 정치, 운동,
예술 모두 1인 사업이며 인생 그 자체가 사업이다.

지난 30년 동안 내 말을 들은 사람은 성공했다.

지난 세기에는 여러 번의 전쟁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2차 세계대전이다.

한국에서도 금세기 초의 통일 때까지 거의 50년의 역사를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전쟁이 있었는데 그것을 6.25라고 부른다(요즘 학교에서는 이런 걸
가르치지 않고 또 학교에 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역사에 대해서는 정말
무지하다).

전쟁은 파괴와 죽음을 의미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복구와 희망의 상징
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원자폭탄으로 참혹하게 종결된 후에 20년이 지나지 않아
패전국도 승전국도 모두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풍요한 시절을 누리게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일했고 복구장비며 자재를 생산하기 위해
공장은 기운차게 돌아갔으며 생산, 무역, 소비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결과 생겨난 부를 분배함으로써 모두가 살 만한 시절이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베이비붐이라는 게 일어난 것이다.

젊은 친구의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은 대부분 베이비붐 세대다.

나 역시 베이비붐 세대다.

세계적으로는 1946년부터 64년까지 출생한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에서는 대략 1960년대생이 한때 전체 인구의 19퍼센트나 됐고 70년대생
은 17퍼센트쯤 된다.

20년에 걸친 두 세대가 37퍼센트나 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쓰기 시작한 스무 살 중반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렇다.

일단 결혼사업이 최대의 호황을 맞았다.

그때부터 나는 이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결혼하고 관련된 것이면 무엇을 해도 된다.

신혼여행에 필요한 여행가이드, 기념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 예물을
파는 귀금속상, 이불가게, 가구점...

그뿐인가.

결혼 뒤에 아이를 낳는다.

그렇다면 유아복, 장난감, 유치원, 학용품, 아동서적이 호황을 맞는다.

내 말대로 되었다.

그리고 또?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수도 있고 놀이동산에 가기도 하고 여행도,
외식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출발했다 돌아올 장소 곧 주택...

사업할 게 천지였다.

그 때 내 말을 귀담아 듣고 실천했던 사람이 바로 이 빌딩의 주인이다.

이 빌딩이 3백86층인 것은 20세기말 한때 이 사람이 386세대라고 불리었기
때문인데 그걸 기념하고 또한 그 세대에 어필하기 위해 일부러 층수를 이렇게
만들었다.

21세기로 넘어와서는 어떻게 되었나.

베이비붐 세대는 기성세대가 되고 그들의 아이들 세대인 X, Y세대, 그리고
네트워크 세대라는 N세대, 세상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고 남들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NQ(No Question) 세대가 오고, 만사에 의욕이 없는 ND
(No Desire) 세대가 왔다.

그러나 난 내가 속한, 내가 잘 아는 베이비붐 세대에만 관심을 가졌다.

신세기 초에 이르러서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좀 많아졌는데 그래도 백 명
중에 한 명이 될까말까였다.

이제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그렇다.

돈을 벌려고 한다면 시대의 흐름, 그 중에서도 움직일 수 없는 함수 하나를
잡아서 그 함수를 통해 세상을 관찰 분석하고 그 추이를 따라가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바로 베이비붐 세대에 주목했고 오늘까지도 그 흐름을 좇으라고 충고해
왔다.

물론 베이비붐 세대는 이미 60세가 넘었다.

새로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조금 더 밀고 나가는 게 유리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나도 요새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이렇게 파리를 날리고 있다.

아 참, "파리를 날린다"는 말은 전세기 중후반에 유행하던 말이다.

장사가 안되어서 귀찮은 파리나 쫓는다는 뜻이다.

요새 서울에서 파리 구경하려면 곤충관에 가야 하니, 이런 말이 사어가
다 되었다.

이제야 내가 나 자신의 사업을 디자인할 때가 온 것 같다.

요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세상에는 불필요한 정보가 너무 많다.

별것도 아닌 일이 전파와 선, 동화상, 예술...

온갖 경로로 가공되어 돌아다닌다.

가만히 있으면 똑같은 일을 다룬 뉴스에 하루 1백번 이상 노출된다.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 해주니까, 아니 다 해주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이제 나도 이런 사업을 하자.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집을 하나 짓는다.

집안에는 별다른 가구가 없고 벽에도 사람 눈을 자극하는 화상이니 흔한
장식도 없다.

너무 밋밋하면 뭣하니까 지난 세기의 수도원처럼 회칠이나 할까.

집의 이름을 단다.

침묵의 집, 생각의 장소.

뭐 어떤 것도 괜찮겠다.

이 방에 들어오면 말을 할 수 없다.

아는 사람과 만나도 인사를 해서는 안된다.

뭘 먹거나 통신을 하는 것도 안되고 전자나 전파와 관련된 일체의 도구를
휴대할 수 없다.

그럼 뭘 하느냐.

말 그대로 침묵하고 생각한다.

생각하다 계산할 일이 있으면 암산으로 한다.

암산이 뭔지 모른다? 그럼 그런 종류의 생각을 안하면 된다.

앉아도 되고 누워도 되고 물구나무를 서도 된다.

다만 다른 사람의 침묵과 생각을 방해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나는 침묵해도 되는 장소,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무위의 행복, 정화된 공기,
소음의 해방구를 제공한다.

입장료를 얼마나 받겠느냐구?

글쎄, 내 생각에는 시간당 3백만원은 받아야 될 것 같다.

사람이 너무 많이 들이닥칠까 걱정이 좀 된다.

젊은 친구, 친구도 돈을 벌고 싶거든 다 때려치우고 내 집 옆에다 오두막을
하나 짓는 게 좋을 것이다.

응? 자네가 바로 그 ND세대라구?

그러니까 21세기 초에 한두 해 기승을 부렸던 쬐끄맣고 귀여운 베이비붐
세대.

생각해봐, 진짜 사업은 바로 이런 거야.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