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지는 노사문제 대책 ]

최근 노동계의 움직임을 보면 몹시 걱정스럽다.

"근대 문명국가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인가"

서구사회도 20세기 중엽까지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노동운동에 시달렸다.

일본도 노동쟁의에서 벗어난 것이 70년대 이후였다.

우리도 근대국가로 가는 통과의례를 치르는 것이라면 인내심을 갖고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사 갈등 구조를 지켜보면 불안한 마음이 여전하다.

"경총"이 출범한 것은 70년 7월15일이다.

경총 설립 움직임은 필자가 62년 경제인협회 사무국장 취임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협회는 63년 후반부터 경총의 모체가 될 "노무관리실무자 간담회"를
운영했다.

발상의 배경은 이러했다.

기업인과 근로자는 경제발전의 두 축이다.

두 주체가 결합된 운명공동체이다.

두 주체의 공생.공영을 이룩할 근대국가의 중추적 시스템을 이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사람부터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박한 생각이었다.

이런 구상에 따라 노무관리 실무자 간담회를 63년 후반에 발족시켰다.

종업원이 비교적 많은 회원회사 과장급 이상 인사들로 조직했다.

노사관계의 기초부터 배우고,상호 경험과 지식을 교환하자는 취지였다.

당시 노사 분쟁은 주로 방직업계에서 일어나 방직협회가 이 문제를
다뤄왔다.

그러나 국민경제나 세계노동운동의 변화에 부응할 정도는 아니었다.

필자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런던 정경대학(LSE) 유학 시절
(57~59)부터였다.

런던 정경대학은 전후 영국 노동당 정부, 특히 복지국가의 산실이다.

19세기 말부터 세계 진보적 지성의 메카라 할 페비안(Fabian Society)
설립주역인 시드니 웨브(Sydney Webb)와 버나드 쇼(Bernard Show)가 근로자들
대학으로 LSE를 설립했다.

이런 영향을 받아 필자도 "경제발전과 노동운동 비교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래서 60년대 유럽 각국을 경협 증진차 순방하면서 노사관계도 빠짐없이
탐문했다.

스웨덴은 필자에게 노사관계의 모델을 제공했다.

68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을 방문했다.

도시 중심인 세르겔 광장에 서니,중심부에 스웨덴경영자총연합회가 있다.

바로 옆에 스웨덴 노동총연맹,그 옆에 소비조합연합회 건물이 마치 3자
정립하는 양 사이좋게 서 있다.

이들 세 단체 본부 건물을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싶었다.

장차 한국도 근대국가가 되어 성장과 발전의 주역들이 이렇게 공생,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을 노사관계의 모델로 삼겠다는 다짐(?)을 했다.

"노사관리 실무자 간담회"의 초대 간사는 한국유리 피용수 과장이다.

대한양회 박청산 노동고문 등이 열성적으로 활동하면서 회원사 노사문제의
중요성을 점차 인식하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초 과장급이었던 간담회 구성원이 부장, 중역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되니 노사문제에 밝은 사장들도 속속 나타나고, "노사 전담조직"을
운영할 인적진용도 갖추게 된다.

69년초 필자는 황정현 조사역(경총, 전경련 상근부회장, 작고)을 불렀다.

"황 차장.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근대국가에서 노사관계는 핵심과제가
아니오. 회원사 노사문제 인식도 높아졌고 전문 인력도 어느 정도 양성됐소.
가까운 장래에 경제계의 노사전담 기구를 마련할 구상이요"

황 조사역은 긴장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앞으로의 노사문제는 사나이가 단 한번 주어진 생애를 걸만한 값어치 있는
일로 나는 생각하오. 황 조사역은 내 말을 믿고 지금부터 노사문제를 해 볼
생각이 없소. 내가 좀 젊다면 생애를 걸고 노사문제를 다루고 싶소. 그리고
우리나라도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 ILO)에
가입해야 되고 신생국가들의 모범이 될 경영자 조직을 만들어야 하오"

황정현씨는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된 후에도 필자에게 "왜 자기에게 생애의
일로 경총을 맡기려 했는지 궁금하다"고 여러 차례 물었다.

무엇을 믿고 황정현씨에게 "생애를 걸라"고 말했는지 필자의 만용(?)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