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쯤 도시의 잡답을 떠나 발길을 근교로 돌리면 흔히 눈에 뜨이는 것이
물가의 갈대와 길가의 억새와 논가의 볏짚이다.
그 나름으로 일생을 마감하고 한갓지게 서 있거나 누워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여유까지 느끼게 한다.
거기서 무엇이 더 되고 안 되고는 이제 제 할 탓이 아니라 남의 할 탓에
달린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추세에 따라 처분될 운명임을 저먼저 아는 듯한 표정 같기도
하다.
키가 있는 들풀은 대체로 뼈대가 있다.
갈대가 강해 보이고 억새가 억세어 보이는 것도 다 그 까닭일 것이다.
그렇지만 볏짚은 신분이 다르다.
농부들의 땀과 돈으로 자란 탓에 부들보다도 부드럽고 질경이보다도 질기지
않다.
논에 있을 때도 이삭이 영글은 채 걸핏하면 비바람에 쓰러져 속을 태운
체질이니 하물며 논에서 나온 다음에야 여북할 터인가.
볏짚은 제 키에 비하여 턱없이 허름해 보이기 쉬운 물건이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움켜 쥔다"는 속담이야말로 볏짚을 가장 허름
하고 하찮게 여긴데서 나온 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볏짚이 허름하고 하찮게 여겨질 때는 짚뭇에 들지
못하고 지푸라기로 나뒹굴어다닐 경우라는 것이다.
마치 피륙에서 떨어진 자투리는 비록 값나가는 비단일지라도 어디까지나
헝겊쪼가리에 지나지 않듯이.
제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는 갈대나 억새에 견주지 않아도 나는
누워 있는 짚뭇을 볼 때마다 어느새 아련한 추억이 된 여러 기억과 더불어
반갑고 미더운 눈길이 되는 것을 깨닫곤 한다.
짚뭇은 늘 두텁고 푸근하다.
짚뭇은 일쑤 못내 못다한 듯한 어떤 아쉬움이 있었음을 일깨워준다.
짚뭇은 또 이제는 다 때가 지나고 말은 어떤 그리움이 있었음도 일깨워준다.
짚뭇은 그래서 나에게는 향수의 빌미인지도 모르고, 동심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고향의 상징이거나 고향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볏짚은 갈대나 억새처럼 강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무엇을 만들어도 쉽게 접히고 힘없이 따라준다.
농가에서는 지붕이 되고 울바자가 되어주었다.
섬과 가마니가 되고, 둥구미와 멱서리와 삼태기가 되어주었다.
멍석과 맷방석과 짚방석이 되고, 멍덕과 똬리와 구럭이 되고, 새끼와
밧줄이 되었다.
개인 날엔 거적자리와 짚신이 되고, 궂은 날엔 도롱이와 접사리가 되어
농부의 비바람을 가려주었다.
지푸라기는 검불이나 북더기처럼 보잘것 없이 약하되 짚뭇은 갈대나 억새에
비길 수 없이 강했다.
이토정이 아산에서 고을살이를 할 때 관내의 노숙자를 모아 걸인청을 열고
자립 갱생의 밑천을 삼게 한 것이 짚뭇이었고, 지난 70년대의 새마을운동에서
농촌 사람들이 가마니를 새끼틀로 자조 협동의 밑천을 삼았던 것도 짚뭇의
지구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볏짚이 그렇게 농촌의 세간이 되거나 살림살이를 일으켜준 바탕이 된 것은
그 수명과 용도의 폭이 그만큼 길고 넓었기 때문이었다.
볏짚의 쓰임새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날 농촌의 산모들은 흔히 볏짚을 깔고 해산을 하였다.
순산을 하면 새끼를 꼬아 금줄을 친 것도 볏짚이었다.
닭이 둥우리에서 병아리를 깰 때나 마소가 새끼를 낳을 때 깃으로 쓴 것도
볏짚이었다.
앞에서 갈대나 억새와 신분이 다르다고 했던 뜻도 그것이었다.
볏짚은 그만큼 깨끗한 것이었다.
볏짚은 그만큼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갈대와 억새와 온갖 풀을 읊은 시인은 많아도 이 신선한 생명력의
상징인 볏짚을 노래한 시인은 적었다.
툭하면 민초를 자처하는 시인도 볏짚의 부드럽고 따뜻함보다 강하고 억센
갈대와 억새를, 그리고 그것들의 차고 굳은 쪽을 노래한 것이 더 많았다.
볏짚은 더 나아가 바로 우리의 역사였음에도 민초의 그 이전 명칭은 민중일
터이고, 민중의 원 명칭은 민서였을 터이되, 그 명칭이야 무엇이 되었건 그
속에 삶의 질적 향상에 대한 의지가 배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신분상승 이전에 우선 살림살이의 셈평부터 펴이기를 바라는 소박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볏짚의 속성을 인간에 비추어 말한다면 대체로 남에 대하여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예의 바른 태도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겸양과 공손은 얼핏 보아서 허름하게 비칠 수도 있다.
오만 불손이 행세하는 세태라면 한결 더할 수도 있다.
짚가리에 소리 없이 누워 있는 짚뭇이 뻣뻣하게 서서 바람부는 대로
휘둘리며 소리내는 갈대나 억새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생각하건데 비록 허름하게 비칠망정 부드럽고 따뜻한 저 볏짚 편을 들어
신분상승보다 인격상승부터 꾀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는지.
물론 나부터서.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