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NGO를 움직이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소외된 곳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해 이를 실천에 옮긴 맹렬 행동가들이다.

올해로 66세를 맞이한 랄프 네이더는 자신의 묘비명을 "영원한 시민
( Full-time citizen )"으로 일치감치 정해 놓았다.

그는 시민운동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결혼도 하지 않았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소비자운동의 영웅인 네이더를 "20세기 1백대 인물"에
포함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네이더의 NGO활동은 조그만 의문에서 시작됐다.

자동차 제조기술은 급속히 발전하는데 왜 수천명의 미국인이 매년 자동차
사고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65년 하버드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30대 변호사 네이더는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않다"는 책을 발간, 의문을 행동에 옮겼다.

GM의 승용차인 코르제어의 제동장치에 구조적인 결함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GM은 네이더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일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설탐정을 고용, 네이더의 사생활을 몰래 조사했다.

그러나 사생활조사 사실이 발각되면서 상원에서 청문회가 열리고 네이더는
일약 전국적인 유명 인물로 부상했다.

그 뒤 2년간 GM과의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네이더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승리를 따냈다.

GM으로부터 4만2천달러의 배상금을 받고 미국의회가 자동차리콜제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도입하게 만들었다.

영원한 NGO맨 네이더에게 최근의 관심대상은 정보통신업계 최강자 마이크로
소프트사다.

그는 "석유의 록펠러, 철강의 카네기, 금융의 시티코프 같은 공격적인
기업도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무자비하지는 않았다"며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고 있다.

모든 NGO활동의 출발점은 소외받는 곳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라는 진리는
엠네스티의 창립자 피터 베넨슨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61년 5월 8일 영국의 젊은 변호사 피터 베넨슨은 우연히 한 신문에서
충격적인 기사를 접했다.

두 명의 포르투갈 학생이 선술집에서 "자유를 위하여!"라고 건배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파시스트정권에 의해 7년형을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베넨슨은 7시간이나 런던 중심가를 돌고 돌며 이들을
도울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세인트 마틴 성당에 들어가 묵상한 끝에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한 사람의 저항은 효과가 없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저항한다면
반드시 여파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결론을 즉각 행동에 옮겼다.

"잊혀진 수인"들을 보호하자는 글을 런던의 "옵서버"와 파리의 "르몽드"에
동시에 기고했던 것이다.

이 글은 당시 유럽의 양심과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20일 후인 61년5월 28일 국제엠네스티가 탄생했다.

이후 슈바이처박사, 피카소 등 세계 저명인사들이 참여하면서 엠네스티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권단체로 성장했다.

전세계적으로 주목받는 NGO맨 가운데는 한국계 인사도 포함돼있다.

이제 21살의 젊은 청년 대니 서( Danny Seo )다.

12살 때 단 10달러를 가지고 친구들과 함께 "지구 2000"이란 단체를 설립,
지구를 살리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13살때 대니 서는 영국부근 페로스제도의 고래사냥을 반대하는 운동을
조직하고 대기업들을 상대로 삼림보호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런 맹렬한 활동으로 대니 서는 98년 "피플"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중 한명으로 뽑혔다.

"스윙"지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20명"중 한명으로 대니 서를 꼽았다.

대니 서는 수많은 자선단체나 대학에서 정기적인 강연을 하고 뉴스위크
타임 월스트리트저널 등 주요 언론의 잡지에 기고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밖에 "21세기에는 어떤 단일국가나 유엔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환경,
분쟁을 해결할 유일한 세력은 NGO"라고 말하는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 등
수많은 양심적인 세력들과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지구의 마지막 희망인 NGO를
움직이고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