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0월15일 전경련 이사회는 노사담당 별도기구 창립을 정식 의결했다.
이어 준비위원으로 김용성(신한제분), 주창균(일신제강), 김연규(대한중기),
김인득(한국스레트), 김용인(경방) 등 중견급 사장 6인을 위촉했다.
전경련을 주축으로 전 경제계가 노사독립기구 창립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는 당시 노사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었다.
68년 가톨릭노동청년회가 노사문제에 개입했다.
종교계 급진파들이 노사문제에 개입한 첫 케이스였다.
이때 사용자측 사려 부족으로 강화도 심도직물에서 폭력과 오물이 난무하는
치욕적인 여공쟁의가 일어났다.
이어 68년 4월 대한조선 일본항공 시그네틱전자 등의 분쟁은 대형화.장기화
됐다.
경제계는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사관계에 있어 원시적인 충돌은 막아야 했다.
막무가내식 충돌은 양측 모두에 부끄러운 일이다.
이를 위해 사용자측을 계도하고 각급 노동조합과 건설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전담기구의 설립 필요성이 높았다.
전경련은 다음과 같은 각종 경총 준비회합을 만들었다.
69년 11월17일 시내 외교구락부에서 준비위원회를 열고 노사 전담기구
창립과 관련한 여러 원칙을 마련했다.
70년 2월15일에는 전경련 회의실에서 김용완 전경련 회장, 김용주 최태섭
부회장, 김봉재 기협중앙회장, 조홍제 사장(효성 조석래 회장 선친) 등
재계 지도자들이 창립 준비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이어 같은 달 20일에는 KAL호텔에서 70년대 노동문제 간담회를 개최한 후
노사전담창구 창립대표로 김용주 주요한 회장을 천거하여 앞으로 설립될
경총의 지도체제를 짠다.
그해 7월13일 창립총회 개최 직전 다시 준비위원회를 열어 회원가입자를
최종 확인하고 예산조달방법 등을 점검했다.
이로써 법적 요건인 창립 총회만 남겨뒀을 뿐 모든 준비를 끝냈다.
필자는 준비위원들과 이 과정을 하나하나 살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범 경제계의 노사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또 후에 독립된 경총이 노사 전담기구로서 자율적 운영에 추호의 차질이
없도록 빈틈없이 준비했다.
40여개에 가까운 조직을 설립, 운영한 경험이 있는 필자에게 경총 창립만큼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경우도 드물다.
전경련과 같은 재계단체가 나서 경총을 설립한 사례는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의 게이단렌을 비롯, 선진 각국의 노사담당 경영자단체는 각기 다른
단체의 지원없이 설립됐다.
일본 게이단렌만 해도 48년 맥아더 사령부의 허락이 떨어지자 "자유기업체제
수호"의 깃발을 들고 출범했다.
당시 재벌해체, 공산당 및 노조활동의 자유로 일본 재계는 붉은 깃발에
포위된 상태였다.
이런 위기를 탈출할 목적으로 당시 요세다 수상과 가까웠던 몇몇 재계
지도자들은 급조하다시피해 노사전담기구를 만든 것이다.
필자는 64년 게이단렌을 첫 방문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리는 아시아 생산성 본부회의에 참가한후 귀국하는
길이었다.
마침 같은 회의에 참석했던 닛산자동차 노조 간부 시오즈씨의 안내를
받았다.
시오즈씨는 일본 해군사관학교 재학중 종전을 맞아 진로를 고민하다
노조활동에 나섰다고 한다.
노조활동을 열심히 하면 중역 지위까지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노조 지도자가 회사 중역이 되는 사례가 잦다).
필자는 시오즈씨의 솔직 담백한 성격에 끌려 최근까지 가까이 지냈다.
이후 게이단렌과 관계는 지속됐다.
필자는 수차례 게이단렌을 방문, 아이디어를 얻었다.
일본 재계의 거물 사구라다 다케시 회장을 면담할 기회도 있었다.
이런 관계는 신설된 경총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같은 선진각국의 노동운동 사례까지 연구해 경총 창립총회에서 채택할
결의문을 마련했다.
지금 읽어봐도 참신하고 또 노사관계의 이상과 비전을 간결하게 설명한
명문이다(전문 월간 전경련 70년 7월호, 한국경총 20년사 p111).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