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질곡에 빠뜨리고 세계경제 전체를 위기로 몰고 갔던 환란의
원인을 뿌리부터 규명하는 일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또
한국경제를 탄탄한 체질로 바꾸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데이비드 데로사 예일대 교수는 새 천년의 문턱에 선 한국경제가 꼭 풀고
넘어가야 할 과제로 외환위기 원인 규명을 들었다.

데로사 교수는 특히 외환위기의 원인을 밖에서만 찾지 말고 안에서부터
찾아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정부는 환율을 시장에 맡기고 국내 경제정책을 안정적으로
운영함으로써 국제 투자자들에게 원화에 대한 신뢰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들도 자금조달방식을 은행을 통한 간접금융보다는 증권시장을 통한
직접금융 위주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충고했다.

데로사 교수로부터 한국경제가 새 밀레니엄을 맞아 풀어야 할 당면 과제에
대해 들어봤다.

-----------------------------------------------------------------------

-새 천년의 출발점에서 한국경제가 꼭 풀어야 할 숙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외환위기의 경험은 한국경제에 두고두고 값진 교훈이 될 것이다.

한국 경제를 질곡에 빠뜨리면서 세계경제 전반을 위기로 몰고 갔던 환란의
원인을 뿌리부터 규명하고 재조명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일이다.

앞으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고 한국경제를 탄탄한
체질로 환골탈태시키기 위해서도 그렇다"

-환란의 원인은 어떤 식으로 밝혀야 하는가.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은 우선 한국을 전염시켰던 아시아 외환위기를 그
근원부터 살펴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나는 크게 네가지 요인이 아시아 경제를 위기로 몰고 갔다고 본다.

첫째 97년 외환 위기 이전까지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고정 또는 관리
환율제를 시행했다는 점이다.

둘째 민간이든 공공부문이든 할 것 없이 부채가 적정 수준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과다했다.

셋째 대부분 국가들이 막대한 무역적자를 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넷째 아시아 각국은 부동산과 특정 개발 프로젝트에 파멸적인 규모로
자금을 편중시켰다"

-외환위기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환 투기꾼들의 공격에 의해 아시아 경제가
위기에 휘말렸다고 지적했다.

"그런 주장은 얼핏 듣기엔 설득력이 있다.

그 때문인지 평소 과격하고 목소리 큰 것으로 유명한 마하티르 모하매드
말레이시아 총리는 환투기 음모론을 소리 높여 주장했다.

심지어 비교적 합리적 인물로 통했던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나 도널드
창 홍콩 재무장관 같은 사람들도 이런 주장에 동조했다.

이제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환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만큼 사태의 원인을
보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짚어봐야 한다"

-국제 투기꾼들의 장난이 환란의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은 외환위기 당시나
그 후 한국에도 상당히 널리 퍼졌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 외환위기의 진짜 원인이었는가.

"지난 97~98년 당시 아시아를 강타했던 외환 위기의 충격파를 가장 심하게
받은 나라는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한국등 4개국이었다.

당시 이들 네나라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었던 경제적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막대한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였다.

4개국 공히 경상 적자는 계속 늘어가는 추세였다.

경상수지 적자는 수출보다 수입을 더 많이 할 때 발생한다.

이로 인한 적자를 메우기 위해선 외국으로부터 자본을 수혈받는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적자 비율이 95년에 1.9%였으나
이듬해인 96년에는 4.7%로 뛰어올랐다"

-아시아 국가들중 특히 한국이 두드러졌던 문제는 무엇인가.

"부채다.

민간과 공공 부문에서 누적된 엄청난 규모의 부채는 그 누구도 아닌 한국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98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30대 대기업그룹들의
부채비율은 96년말 현재 4백%가 넘었다.

한마디로 한국 경제는 과도한 빚더미에 올라 앉아 있었으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였다"

-금융정책이나 기업 자금관리 측면은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안고 있던 부채 가운데 상당 부분은 자국 통화인
원화가 아니라 미 달러화로 표시돼 있었다.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와 저성장 그리고 취약한 금융 시스템과 관리환율제도
는 상호작용에 의해 국가경제 전체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엄청난 휘발성
을 잠재하고 있었다.

당사자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더욱 큰 문제는 97년 당시 자금중 상당 부분이 경제적 효용이 의심스러운
부동산이나 특정 산업개발 프로젝트에 편중적으로 몰렸다는 점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채무 리스크를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일부 은행들은 보수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할 금융기관 본연의 모습을
저버린채 국가 복지기관이라도 되는양 마구잡이로 대출 업무를 수행했다"

-외환관리 면에서의 시행착오는 없었는가.

"전반적인 여건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고정환율 또는
관리환율제도를 실시했던 것이 사태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국제적으로 자본이 빠른 속도로 유출입되는 시대에 금융 주권을 유지하면서
환율을 일정 수준으로 묶어놓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일련의 문제점들을 되짚어 보면 한국 등 관련 국가들은 외부충격에
대단히 취약한 상태에 있었다.

바꿔 말해 해당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외환 위기를 겪기 위한 필요조건을
이미 내적으로 길러내고 있었다는 얘기다.

원래 자본은 속성상 위기의 조짐이 보이는 곳을 대거 탈출하게 돼 있다.

공황에 가까운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 자본의 이탈을 막아낼
도리는 없다"

-그래도 아시아의 위기탈출 정책들은 성과를 거뒀다.

"이와 관련해 짚어봐야 할 것은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정부가 단행했던
자본통제 실험의 과정과 그 결과다.

마하티르 총리는 자신의 자본통제 조치가 보다 부드럽고 유연한 방식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해내는 성과를 거뒀다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마하티르 총리가 이처럼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지난 9월 자본 통제 조치를
해제한 이후에도 대규모 자본이탈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마하티르 총리는 당시 링기트화를 대폭 평가절하했다.

말레이시아는 외환 위기가 절정을 치닫고 있던 당시 자본통제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링기트화 환율을 미 달러당 3.8링기트로 고정시켰다.

그 후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벗어나면서 통화가치 역시
절상됐지만 말레이시아 링기트화만은 달러당 3.8링기트에 머물렀다"

-통화가치의 절하가 경제회복의 진짜 원인이란 뜻인가.

"그렇다.

일본 엔화는 말레이시아가 외환 통제를 실시했던 1년동안 35%나 절상됐다.

덕분에 말레이시아는 수출에서 큰 재미를 봤다.

인위적 통화 절하조치 덕분에 수출가격 경쟁력 면에서 월등하게 유리해졌고
그 덕분에 말레이시아 경제는 외환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이런 실험이 요행수로 맞아 떨어지기는 했지만 마하티르
정부는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놀았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행여 다른 나라가 말레이시아의 전례를 따랐다가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지도 모른다"

-한국경제가 새 밀레니엄을 기회로 만들기 위해선 어떤 전제조건들이
필요한가.

"진정한 경제적 부와 번영은 자유 시장경제에서 나온다.

한국은 이 점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

외환제도의 경우 환율의 결정을 시장기능에 맡기는 자유변동환율제도가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부 개입은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환율은 외환시장에서 거래되는 통화의 가격이다.

가격은 해당 상품의 시장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자유롭게 변동하다가 균형점을
찾는다.

원화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가 할 일은 따로 있다.

국내 경제정책을 안정적으로 운영함으로써 국제 투자자들에게 원화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는 일이다.

한국은 또 자본시장 자유화 조치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일국 금융시장이 안정되려면 잘 정비된 금융기관들을 다수 길러냄으로써
시장 저변을 넓혀야 한다.

외환 위기는 한국이 왜 소수의 몇몇 대기업들에만 의존해선 안되는지를
적절하게 가르쳐줬다.

회계 보고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도 절실하다"

< 대담=이학영 뉴욕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