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현 < 고려대 교수 / 산업개발연구소 소장 >

어느 기업의 임원회의에 참석해 "비전 없이 미래 없다"란 주제로 강의한 뒤
이런 질문을 받았다.

"교수님 말씀이 이해는 되나 지금의 혼돈과 불안정이 가득찬 뉴밀레니엄
시대에 과연 비전이 필요할까요.

코앞의 내일도 모르겠는데 5년, 10년 후의 비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21세기는 불투명하고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앞이 잘 안보입니다.

그렇다고 하던 일만 계속 파먹으면 될까요.

그런 기업들에 남는 것은 퇴보와 몰락뿐입니다.

앞이 안보일수록 촛불도 켜보고 헤드라이트도 켜봐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미래지향적인 정보는 책상 주변머리엔 별로 없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밖에 나가 찾아봐야 합니다.

혼돈의 시대가 안정된 시기보다 더 큰 성장의 호기를 갖다주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기업이 꼭 가고 싶은 미래 모습"인 비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전을 당겨와서 어제와 다른, 미래 지향적이고 창의적인 일들을
"오늘" 실천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21세기는 변화가 격심한 시대이기 때문에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환경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지금 비전이 없다면 변화를 알 수도
없을뿐만 아니라 이러한 변화에 휘말려버릴 것입니다"

또 이런 질문도 있었다.

"우리도 이전에 비전을 만들어 봤는데 IMF 돌풍을 맞으니깐 무용지물이
되더군요.

이래도 과연 비전이 필요합니까"

물론 IMF 관리체제라는, 어떻게 보면 너무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따라 비전의
내용들이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점쟁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전도 환경변화를 주시하면서 계속 수정, 보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 기업들이 그동안 비전 자체를 잘못 만들었다는 데
있다.

과거엔 거의 모든 기업들이 고도성장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외형
확대 추구만을 위한 내용을 비전에 담았다.

즉 자신의 핵심역량을 근거로 한 초점 있는 성장을 추진하지 않고, 약점
보완형 외형 성장을 지향했다.

첨단 성장사업들로 보이는 거의 모든 사업들을 미래에 추구해야 할 사업영역
으로 잡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따라서 비전과 미래 사업영역은 그럴 듯하지만 실천과는 거리가 먼 전시용
비전이 되고 말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같은 업종의 기업들이 서로 베낀 듯이 아주 비슷한
비전과 미래 사업영역을 제시했었다.

IMF 돌풍을 맞지 않았어도 분명히 실패작이 됐을 것이다.

비전이란 기업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업, 다른 기업이 쉽사리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녹아든 미래의 모습인 것이다.

또한 비전은 구성원들의 꿈과 열정이 녹아들어 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미래의 도전적인 모습이다.

비전의 구체적인 내용은 외형 규모보다는 차별성, 독창성, 총주식 가치,
브랜드 인지도 등으로 나타나야 한다.

또 비관련 다각화를 통한 외형 확대보다는 핵심역량과 기업의 강점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구성돼야 한다.

21세기는 그야말로 프로기업만 살아 남는 시대이다.

기업 특유의 색깔과 냄새가 있어야 한다.

뭔가 남들과 차별화된 독특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 3등은 꼴찌나 다를 바 없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1등이나 1등에 아주 근접한 2등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제는 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되고 비전을 갖고 되게 하며 살아가야
한다.

비전이 없는 기업의 공통적인 현상은 21세기 첫해의 사업계획이나 3~4년
전의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업에서 일하는 구성원들은 늘상 비슷한 일을 하는 까닭에 그다지
신바람 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따라서 조직내 활력이 없고 현상유지의 풍토가 팽배해지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비전 없는 기업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으므로 인재가 들어오지
않으며, 설사 들어온 이후에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비전이 없는 기업에 인재가 왜 남아 있어야 하는가.

인재가 없는 기업에 과연 미래가 존재하겠는가.

기업이 아무리 크고 역사가 오래됐더라도 구성원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비전이 없으면 조직은 무사안일한 사람들과 갈 데 없는 사람들로
꽉차게 된다.

규모가 작고 연륜이 얼마 안되는 기업이라 할지라도 비전이란 역을 향해
나아가는 기차에 구성원들을 탑승시킬 수 있다면 언제나 인재가 모일 것이다.

이러한 조직은 항상 긴장과 열정으로 가득찰 것이다.

< hyeon@tiger.korea.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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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고려대 졸업
<>프랑스 리옹대 경영학 박사
<>저서:21세기 기업 생존전략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