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 < 수원대 교수 / 철학 >

몇 해전 나는 물과 태양의 나라 이집트에서 영원한 불멸의 상징 피라미드를
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나도 그 규모와 수학적 정교함에
놀랐다.

그렇지만 오늘도 썩지 않고 버티고 있는 람세스를 보았을 땐 놀라움에
앞서 쓰디쓴 전율이 먼저 왔다.

세상에,불멸에 대한 사랑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겠지만 권력의 상징이
불멸의 상징이 되어 썩을 자유도 없이 수천년을 방부제로 버텨온 영혼은
왠지 안쓰러웠다.

죽어서도 이집트의 구심점으로 버텨내려고 하는 왕의 애국심이었을까,
죽음에서도 평등하지 못한 영원한 권력의 폭력이었을까?

그 규모에 놀란 만큼 나는 그 규모가 무거웠다.

죽을 자유도 없는 그 땅이 어쩐지 갑갑해서 피식 웃기도 했다.

그 거대함 속에 우악스럽게 감춰져 있는,죽음도 깨지 못한 불평등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풍경이었다.

도대체 권력이 뭐길래?

누워 있는 자가 내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런데 이상하다.

숨이 막혔고 무서웠고 낯설었는데 나는 그 이집트에 또 가고 싶은 것이다.

그 기묘한 매력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잡아 끄는 것일까.

그 복잡한 힘이 문화의 힘이고 정신의 힘이다.

문화는 정신이다.

그렇지만 문화산업은 경제다.

정신을 포장해 파는 산업이다.

정신은 팔릴 수 없는 거겠지만 정신이 토해내는 수많은 흔적들은 이제
"산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무서운 생산력이다.

먹고 살만해지면 인간은 "문화"에 눈을 돌린다.

먹고 사는 일이 치열해지면 질수록 인간은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는 정신을
찾아 헤맨다.

그 인간의 역마살이 동하는 동네는 뉴욕이 아니라 이집트고 테헤란로가
아니라 지리산 자락이다.

테헤란로도 문화고 하회마을도 문화건만 영국여왕이 이 나라에 와서 찾은
것은 테헤란로가 아니라 안동 하회마을이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남을 매혹시킬 수 있는 것은 남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나"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나다운 것이 있을 때 "나"는 소박하더라도 무시당하지 않으며 내가 나를
아낄 때 남도 나를 존중해 준다.

그런데 돌아보면?

돌아보면 보인다.

우리의 지난 세기는 그 "나"를 지우는 과정이었음을.

1970년대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근대화운동이라고 지칭된 새마을운동
을 기억한다.

기억속에 각인된 그 슬픈 노래.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가난한 나라의 무지가 죄였을까?

나는 물소리 새소리에 깨지 못하고, 종종 확성기로 마을 전역에 퍼져 갔던
그 무모하고 배려를 모르는 소리에 깨어나 시끄러운 아침을 맞아야 했다.

그래도 그 소리의 위력은 대단한 거여서 나는 초가집의 문화를 배우기
이전에 아파트를 동경하기 시작했고, 약상같은 우리 밥상의 장점보다는 빵과
버터의 편리함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나는 성황당의 미학을 배우기 이전에 미신이라고 외면하며 능멸하는 법을
배웠고, 마을어귀의 잘 자란 느티나무와 돌담의 아름다움에 눈뜨기 이전에
어떻게 길이 나 어떻게 땅값이 오르는 건지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철들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돌아본 산하는 너무나 변해 있었다.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초가집, 어디에 가도 높이 솟고 있는 아파트, 어디
에도 없는 성황당, 건물마다 들어선 빨간 십자가, 그 변화가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들의 삶은 생각해보면 아득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이 시대에 달구지로 돌아가자는게 아니다.

복작복작, 사람 위에 사람이 살아야만 하는 아파트 시대에 초가집 짓고
풍류를 읊조리자는 것도 아니다.

교회에 가지말고 샤머니즘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서러운 것은 "왜 우리는 다 버리고 왔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련없이 버리고온 그 속에 얼마나 소중한 것이 들었는지.

나는 일본을 좋아하지 않지만 일본의 힘이 어떤 것인지는 알 것 같다.

도시든 농촌이든 할 곳 없이 곳곳마다 보존되어 있는 신사들, 그 신사
앞에서 당당하게 무엇인가를 기원하는 사람들.

그 풍경을 나는 미신이라고 비웃을 수 없었다.

보편적인 철학도 아닐 것이고 세계시민적인 기원도 없겠지만 도시 한복판
에서까지 잘 보존된 그 문화는 분명 일본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보편적일 수 없는 그 일본식 감수성에는 의외로 막강하면서도
독특한 힘이 들어 있고 그 힘이야말로 일본을 세계로 드러내는 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88올림픽때도 우리 관광객들이 일본에 가서 돈을 더 많이 썼다고
하지 않는가.

여행객들은 자기 나라에 더 잘 건설되어 있는 현대문명의 흔적을 찾아 여행
하지 않을테니까.

그들의 역마살이 따라간 것은 동네마다 보존되어 있는 예스럽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 한 문화흔적이었다.

일본이 버리지 않고 근대화를 소화해내는 힘으로 붙들고 간 것을 우리는
왜 버리고 왔는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왔는지를 생각하면 덜퍼덕 주저앉아
울고 싶다.

무엇보다도 홍수처럼 밀려오는 세계문화를 우리식으로 소화할 수 있는 그
어마어마한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여.

성경 말씀대로 환란이나 역경이나 칼로도 끊어낼 수 없는 그 문화적 자존심
을 우리는 열등감으로 스스로 끊어내고 그리고 스스로 미아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기죽지 말아야지.

21세기, 문화의 세기라고 들뜬다.

나는 생각한다.

주체성이 없는 세계화가 세계화의 이름으로 세계의 뒷전으로 밀려가는
것이었듯 자기사랑이 없이 문화적 창조성은 없다고.

문화를 먹고 문화 때문에 사는 이들이여.

잊지 말자.

나에게 솔직한 고백이 남을 감동시키듯, 자본경쟁력이 없는 상황에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사실을.

< ja1405@chollian.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