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년기의 먼 시평을 바라보면 눈에 먼저 들어오는 움직임들 가운데 하나는
인류 사회들이 하나의 문명권으로 빠르게 통합되는 추세다.

국제화나 세계화는 그런 추세의 몇 가지 측면들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이런 사정에 담긴 중요한 함언 하나는 모든 분야들에서 하나의 세계적
표준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 표준화는 물론 산업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제품들은 세계적 표준들에 맞춰 분류되고 생산되며 첨단 산업들에선
기업마다 자신의 제품 규격을 산업 표준으로 만들어서 망경제 (network
economy)의 이익을 선점하려고 애쓰고 있다.

표준화는 다른 모든 분야들에서도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유행이 거의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퍼진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취향의
표준화는 퍽이나 상징적이다.

표준화는 본질적으로 경제적 논리에서 나왔다.

자연히 세계성( globality )의 시대에서 세계적 표준의 부재는 큰 혼란과
비효율을 뜻한다.

이미 자리잡은 표준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 손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3000년기에 인류가 맞은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
사정이나 민족주의 때문에 세계적 표준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분야들에서도
표준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언어의 표준화다.

몇 천 개의 언어들이 쓰여진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비효율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다행히 영어가 국제어의 자리를 빠르게 차지하고 있어서 늦어도 다음 세기엔
언어의 표준화가 이루어질 것처럼 보인다.

또 하나 시급한 것은 화폐의 표준화다.

가치의 척도와 교환의 매개라는 기능들을 가졌으므로 화폐는 망경제의
효과가 무척 크다.

엄청난 양의 갖가지 국제 거래들이 이루어지는 지금 세상에서 나라마다
자신만의 화폐를 쓰는데서 나오는 손실은 당연히 크다.

언젠가는 온 세계에 통용되는 국제 화폐가 나타날 것이다.

지금 국제 화폐에 가장 가까운 것은 달러다.

달러는 가치의 척도로서 널리 쓰이고 교환의 매개로서도 큰 몫을 맡고 있다.

따라서 작은 나라들은 자신들의 통화를 고집하는 대신 달러를 쓰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달러채택( dollarization )"에 관한 논의가 활발한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달러채택은 합리적 선택일 것이다.

먼저 달러가 지닌 큰 망경제로부터 얻는 혜택이 클 것이다.

달러와 원 사이의 번거로운 환산과 환전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우리 경제는
효율이 적잖이 높아질 것이다.

다음엔 환율변동으로 인한 위험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지난 번에 아프게 깨달은 것처럼 경제적 위기에선 환율기구는 충격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증폭시킨다.

만일 우리가 달러를 통화로 삼은 상태였다면 외환위기는 그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달러채택의 혜택은 개별 기업들의 차원에선 훨씬 직접적이고 실질적일
터이다.

우리 기업들은 환율변동에서 나오는 위협에 거의 대책없이 노출됐고 그래서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다.

이런 손해를 줄인다는 것만으로도 달러를 우리 통화로 채택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반론도 거셀 것이다.

아마도 반론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달러를 우리 통화로 삼으면 우리 정부가
독립된 통화 정책을 펼 수 없으리라는 점이다.

달러채택이 우리 정부의 통화 정책 상실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재앙이기보다는 축복일 가능성이 크다.

역대 우리 정부의 경제 정책들은 정치적 고려들에 큰 영향을 받았고 우리
경제는 재정의 낭비와 정치적 경기 순환이 심했다.

따라서 우리 정부보다는 정치적 영향을 덜 받고 통화의 가치를 훨씬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미국 정부에 통화 정책을 맡기는 것은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다.

통화 정책을 외국 정부에 넘기는 것이 못내 아쉽다면 김영삼 정권이 정치적
이유에서 환율을 비현실적으로 높이 유지한 것이 지난번 경제 위기를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이란 사실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달러를 미국 정부가 발행한다는 사실이 큰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신용카드 사용의 급증, 전자화폐의 등장 가능성, 그리고 인터넷을 이용한
거래의 빠른 팽창은 현금에 대한 수요를 상대적으로 줄일 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달러채택엔 민족주의적 감정이 들어설 틈이
없다.

우리가 영어를 앵글로색슨족의 언어가 아니라 국제어로 대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달러를 대할 때 우리는 그것이 미국 화폐라는 점보다는 국제
화폐에 가장 가까운 화폐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것들이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서 작고 약한 나라가 살아남는 길은
변화의 기미를 남보다 먼저 알아보고 대응하는 것이다.

이제 달러를 우리 통화로 삼는 일을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됐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