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두 동생들에게서 벗어나 혼자 쓸 수 있는 공간이 생기던 날의
기쁨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초등학생이었던 작은 키의 내가 똑바로 설 수도 없는 다락방이었지만
배를 깔고 누우면 아주 먼곳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볼 수 있었다.

밤 늦게까지 불을 켜고 책을 읽어도 방해할 사람이 없었다.

다락방에서 종잇장이 나달나달해지도록 읽은 동화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키다리 아저씨"였다.

고아원에서 자라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주디에게 어느 날 후원자가 생기게 되었다.

후원자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주디를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주디는 한 달에 한 번,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후원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글들이 모아진 것이 지금까지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키다리 아저씨"다.

먼곳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며칠 전, 귀가한 남편이 멋쩍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강남역 앞에 서 있는데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다가와 느닷없이 차비를
달라고 했단다.

남편이 우물거리고 있는 사이 여학생은 차비를 주면 같이 술을 마셔줄 수도
있다고 토를 달았다.

여학생은 이른바 원조 교제의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조 교제가 일본의 풍속도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값비싼 브랜드의 옷을 사 입고 구두를 사 몸치장을 하기위해 거나 오락을
위해 쓸 돈을 벌기 위해 서슴없이 나이 든 낯선 아저씨에게 접근하는 여학생
들이 늘고 있다.

어른들은 용돈을 미끼로 나이 어린 학생들과 버젓이 번화가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사라진다.

어두운 곳에서는 몰랐는데 같이 들어간 밝은 방에서 보니 다름아닌 아버지와
딸이었다는 웃지 못할 코미디가 나돌게도 생겼다.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배금주의가 이제 어린 학생들까지 물들여
놓았다.

곳곳에는 가짜 키다리 아저씨들 천지다.

이제 풋풋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 속에만 존재할
뿐인가.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