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구입하면 4년 동안 쓰는 "물건"이 있다.

4년 전에 이 "물건"을 단 하나라도 판매하는 데 성공한 회사는 세개
뿐이었다.

이 "물건"은 전부 국산품이며 수입도 되질 않는다.

이것 없이는 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소비자는 그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사야만 한다.

공급회사들은 제각기 자기네 "물건"이 제일 좋다고 광고를 한다.

그런데 그 "물건"이 정말로 광고한 만큼 좋은 지를 소비자들은 미리 확인할
수가 없다.

써 봐야만 안다.

하지만 이 "물건"은 일단 구입하고 나면 되물릴 수가 없다.

성능이 형편없다는 것을 확인해도 반품이 되질 않는다.

애프터서비스나 리콜도 절대 없다.

불량품을 산 걸 후회해 봐야 헛일이다.

불편한대로 4년을 쓰고 나서 다음 기회에 다른 물건을 택하는 도리밖에
없다.

이 희한한 "물건"은 다름 아닌 국회의원이다.

참다 못한 "소비자"(유권자)들이 "소비자단체"(총선시민연대)를 만들어 이
"물건"의 품질을 검증하겠다고 들고 일어섰다.

지난 4년 동안 이 "물건"이 얼마나 쓰임새가 있었는 지를 살펴보고 절대로
다시는 구입해서는 안될 "불량품"(자격미달 국회의원)의 목록을 만들어
공개하면서 "공급회사"(정당)들에 이번에는 이 물건을 "출고"(공천)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만약 이 요구를 무시하고 불량품을 다시 출고할 경우 대대적인 "불매운동"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은 시장경제를 헌법적 기본질서로 삼고 있고 시장의 주권자는
소비자인 만큼 여기까지는 당연히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만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그 다음 벌어진 사태를 보면 실로 괴이하기 짝이 없다.

평소 앙앙불락 시장점유율 경쟁을 벌였던 견원지간의 공급업체들이 이
소비자단체의 출고반대 요구와 불매운동 선언을 시장질서를 해치는 범죄
행위라고 일제히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비자 단체의 활동을 단속하라고 "정치시장
공정거래위원회"(선거관리위원회)에 호통을 쳤다.

자기네들끼리는 경쟁회사의 물건을 비난해도 되지만 소비자 단체가 자기네
물건 가운데 불량품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사지 말라고 선동하는 것은 자기네
끼리 만든 "협회규칙"(선거법 87조)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이제 오늘 "정치시장 공정위"(선관위)는 이 운동의 위법성 여부를 가리는
유권해석을 내놓을 예정이다.

그동안 저질 불량품 때문에 속을 부글부글 끓였던 소비자들은 소비자 단체의
불량품 목록 공개와 출고 반대 요구, 그리고 앞으로 전개할 불매운동에
대해서 열화와 같은 지지성원을 보내고 있다.

소비자 단체의 대표와 회원들은 위법 판정이 나도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하면서 "나를 잡아가라"고 말한다.

사태가 어디까지 나갈 지는 두고 볼 일이다.

시장경제에서 소비자는 왕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시장에서 만큼은 소비자는 봉이다.

4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판매기간"(선거기간)에만 허리를 90도로 꺾어
아부를 하고, 화려한 선전문구를 담은 "광고지"(선거공보)를 돌리고, 몰래
"사은품"(향응과 돈봉투)을 뿌리고, 그러고도 불리하다 싶으면 "향토기업"을
살려달라고 호소(지역감정 선동)하기만 하면 불량품도 어렵지 않게 팔아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천운동은 근본적으로 후보자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고
풍부하게 제공함으로써 유권자의 합리적인 선택을 돕고 정치시장의 소비자
주권을 강화하려는 합법적 운동이다.

만약 이것을 범죄로 만드는 법률이 있다면 사라져야 할 것은 총선시민연대가
아니라 그 선거법이다.

선관위가 총선시민연대를 비난하는 "불량품들의 아우성"에 떠밀려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일이 없기를 기대해 본다.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