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21세기를 사는 법 ..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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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21세기가 드디어 찾아왔다.
이 새 천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문득 겁이 날 때가 있다.
1999년 12월31일 밤에는 누구나처럼 흥분이 돼 잠을 설쳤다.
21세기가 오면 왠지 우주복을 입고 색다른 음식을 먹으며 하늘을 날 것만
같은 허황된 기분으로 새해를 맞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발을 땅에 붙이고 걸어가고 있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도 옛날과 같은 그 비와 눈이며, 어느덧 새해 정월도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이다.
새해 들어 나는 또다시 담배를 끊었고, 이번이 마지막 금연이라 생각한다.
컴맹으로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일이 너무도 막막하여 컴퓨터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내게 2000년은 멋진 신세계의 시작일지
모른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주눅들지 말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거다.
문득 신문을 펴니 이런 결혼 상담소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빨리 결혼하는 방법은? 수화기를 든다 3675-2000을 누른다"
역시 버튼을 누른다는 공통점을 지닌 신세기의 광고답다.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은 러브레터를 이런 식으로 쓴다고 한다.
"나는 너를 좋아해. 너도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다음중 하나를 선택해.
1)김영희 2)최안나 3)황혜기"
역시 버튼을 누르는 구애 방법이다.
"지금" "당장" "빨리"-세상은 온통 속도의 깃발을 나부끼는 전쟁터 같다.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 나는 또 어떤 속도에 편승할 것인가.
결혼 상담소는 결혼을 가장 빨리 하는 방법에 관해 목소리를 높여 광고를
한다.
이제 아무도 오래 걸려 누군가에게 구애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선택해. 아니면 늦어"-그런 식이다.
누가 누구를 기다리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아무도 그런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맛있는 즉석 호떡 먹기"
이런 식의 정서가 어디나 만연되어 있는데도 나는 늘 썰렁한 기분이 든다.
아마도 나는 옛 사람들 쪽에 가까운 모양이다.
젊은이들뿐 아니라 동세대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가끔 기분 나쁜 한기를
느낀다.
"오늘 지금 너를 좋아해. 네가 만일 나와 같지 않다면 그만두지 뭐.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테니까 더 생각할 필요없지"-그런 식의 정서가 어디 "남과 여"
의 관계에만 국한될 일이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썰렁함에 나는 또다시 한기를 느낀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설레거나, 기대를 하거나, 믿거나, 그렇게
후진 감성을 지니고 살아서는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 것이다.
마음의 문에 든든히 빗장을 지르고 살면 오히려 편안하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 지 모른다.
비슷한 시기에 죽어갈 동시대인에 대한 동지애 같은 것으로 상대를 대하면
웬만해선 화가 나거나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신 상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비교적 선한 사람들의 처세 방법이다.
썰렁한 사이버의 세계에 세상을 향한 나의 사랑 또한 자라목처럼 안으로
안으로만 움츠러든다.
새 천년이 뭐 그리 다를 것인가.
사람이 오늘 내일 모레 다 정해 놓고는, 이제부터 21세기의 시작이라
우격다짐하는 새 천년을 향한 거품 희망은 아닐까.
문득 윤심덕과 김우진의 죽음을 소재로 한, 꽤 오래된 영화 "사의 찬미"
에서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난다.
"그들은 그 어두운 절망의 시대에 허무의 한 획을 그었다"
세기말이란 늘 허무주의로 채색된, 낭만적이기조차 한 절망의 시간들이었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전역에 퍼진 "데카당스"란 풍조도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당시 유럽인들은 퇴폐적인 문화에 미적 동기를 추구하는 관능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19세기 말 그 절망의 시대에 허무의 한 획을 그었다면, 종류는
다르지만 20세기 말에도 그런 주인공들이 있었다.
때마다 교묘히 사라져서 아예 그가 붙잡히지 않기를 바라던 팬들마저
있었던, 도둑 신창원 역시 미래가 없는 세상을 향해 굵고 진한 허무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일지 모른다.
말세와 휴거론으로 들끓던 세기말의 바람도 지나가고, 21세기엔 의학과
생명공학의 발달 덕분에 늙지도 죽지도 않을 수 있을 지 모른다는 TV 뉴스에
귀가 솔깃해진다.
동시에 문득 그 처럼 무서운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mskangpr@unitel.co.kr >
-----------------------------------------------------------------------
<> 필자 약력
=<>이화여대 서양화과
<>홍익대 대학원
<>미국 뉴욕대 석사
<>석남미술상, 선미술상 수상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2일자 ).
이 새 천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문득 겁이 날 때가 있다.
1999년 12월31일 밤에는 누구나처럼 흥분이 돼 잠을 설쳤다.
21세기가 오면 왠지 우주복을 입고 색다른 음식을 먹으며 하늘을 날 것만
같은 허황된 기분으로 새해를 맞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발을 땅에 붙이고 걸어가고 있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도 옛날과 같은 그 비와 눈이며, 어느덧 새해 정월도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이다.
새해 들어 나는 또다시 담배를 끊었고, 이번이 마지막 금연이라 생각한다.
컴맹으로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일이 너무도 막막하여 컴퓨터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내게 2000년은 멋진 신세계의 시작일지
모른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주눅들지 말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거다.
문득 신문을 펴니 이런 결혼 상담소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빨리 결혼하는 방법은? 수화기를 든다 3675-2000을 누른다"
역시 버튼을 누른다는 공통점을 지닌 신세기의 광고답다.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은 러브레터를 이런 식으로 쓴다고 한다.
"나는 너를 좋아해. 너도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다음중 하나를 선택해.
1)김영희 2)최안나 3)황혜기"
역시 버튼을 누르는 구애 방법이다.
"지금" "당장" "빨리"-세상은 온통 속도의 깃발을 나부끼는 전쟁터 같다.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 나는 또 어떤 속도에 편승할 것인가.
결혼 상담소는 결혼을 가장 빨리 하는 방법에 관해 목소리를 높여 광고를
한다.
이제 아무도 오래 걸려 누군가에게 구애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선택해. 아니면 늦어"-그런 식이다.
누가 누구를 기다리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아무도 그런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맛있는 즉석 호떡 먹기"
이런 식의 정서가 어디나 만연되어 있는데도 나는 늘 썰렁한 기분이 든다.
아마도 나는 옛 사람들 쪽에 가까운 모양이다.
젊은이들뿐 아니라 동세대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가끔 기분 나쁜 한기를
느낀다.
"오늘 지금 너를 좋아해. 네가 만일 나와 같지 않다면 그만두지 뭐.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테니까 더 생각할 필요없지"-그런 식의 정서가 어디 "남과 여"
의 관계에만 국한될 일이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썰렁함에 나는 또다시 한기를 느낀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설레거나, 기대를 하거나, 믿거나, 그렇게
후진 감성을 지니고 살아서는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 것이다.
마음의 문에 든든히 빗장을 지르고 살면 오히려 편안하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 지 모른다.
비슷한 시기에 죽어갈 동시대인에 대한 동지애 같은 것으로 상대를 대하면
웬만해선 화가 나거나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신 상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비교적 선한 사람들의 처세 방법이다.
썰렁한 사이버의 세계에 세상을 향한 나의 사랑 또한 자라목처럼 안으로
안으로만 움츠러든다.
새 천년이 뭐 그리 다를 것인가.
사람이 오늘 내일 모레 다 정해 놓고는, 이제부터 21세기의 시작이라
우격다짐하는 새 천년을 향한 거품 희망은 아닐까.
문득 윤심덕과 김우진의 죽음을 소재로 한, 꽤 오래된 영화 "사의 찬미"
에서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난다.
"그들은 그 어두운 절망의 시대에 허무의 한 획을 그었다"
세기말이란 늘 허무주의로 채색된, 낭만적이기조차 한 절망의 시간들이었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전역에 퍼진 "데카당스"란 풍조도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당시 유럽인들은 퇴폐적인 문화에 미적 동기를 추구하는 관능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19세기 말 그 절망의 시대에 허무의 한 획을 그었다면, 종류는
다르지만 20세기 말에도 그런 주인공들이 있었다.
때마다 교묘히 사라져서 아예 그가 붙잡히지 않기를 바라던 팬들마저
있었던, 도둑 신창원 역시 미래가 없는 세상을 향해 굵고 진한 허무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일지 모른다.
말세와 휴거론으로 들끓던 세기말의 바람도 지나가고, 21세기엔 의학과
생명공학의 발달 덕분에 늙지도 죽지도 않을 수 있을 지 모른다는 TV 뉴스에
귀가 솔깃해진다.
동시에 문득 그 처럼 무서운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mskangpr@unitel.co.kr >
-----------------------------------------------------------------------
<> 필자 약력
=<>이화여대 서양화과
<>홍익대 대학원
<>미국 뉴욕대 석사
<>석남미술상, 선미술상 수상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