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서진씨가 등단 5년만에 첫시집 "중독된 사랑"(문학아카데미)을
펴냈다.

그의 시는 발랄하고 투명하다.

유선형의 볼펜 하나에서 은하수 너머 별을 불러내고 그 별에서 유년의
친구들과 어울려 논다.

때로는 잘 익은 유자차로 자신을 저미다가 "터지는 팝콘"으로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낯익은 생필품이거나 사소한 삶의 틈새들이다.

아니면 자신의 키나 몸무게, 어항, 냉장고 등이다.

그러나 그는 작은 것들의 프리즘을 통해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깊고 넓게
비춘다.

전래동화의 동앗줄을 굵은 빗줄기와 대비시킨 시 "욕심"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떨어져 끝을 알 수 없는 곳으로/길게 이어지는
빗줄기/오뉘가 잡았던 동앗줄도 바로 이것일게야/(중략)/빗줄기가 내려올수록
내 몸이 내려오는 빗줄기 사이로/빨려 올라간다//해와 달의 오뉘처럼 하늘로
간다"

이 시가 하늘과 땅의 이미지를 상향적으로 연결한 것이라면 "틈새"는 세상과
땅밑을 하향 이미지로 잇는다.

"세상은 틈투성이고/나는 늘 틈새로 무언가를 빠뜨리고, 잃어버린다"

그는 "승강장과 열차 사이가 넓은" 지하철 역에서 장갑이나 승차권 열쇠를
떨어뜨리기 일쑤다.

아슬아슬한 틈새 위를 지날 때마다 "발"보다 "영혼"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러나 세상의 틈은 작고도 깊다.

그가 틈을 메우려 "하늘 향해 벌건 배 내보이고/나자빠져 있는/찢어진 부분/
잘 거두어 벌어진 자리 여며/두 박자로 찍어"주지만 세상은 여전히 "헐거워진
쇳소리"처럼 "구석구석 박은 한통의 철심으로도/제대로 추스려지지 않는
모습"("호치키스 혹은 철길")이다.

그는 마침내 상.하향 이미지를 지나 평면의 세계에서 틈의 미학을 발견한다.

"눈이 내린다//그녀가 화장을 한다"로 시작되는 시 "눈 내리는 날"에서
그는 "하얀 눈밭 위로 눈덩이 지나간 길"로부터 "대지의 본성"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는 그녀의 입 주위로 가늘게" 잡히는 주름을 본다.

시인에게 틈이란 사소하면서도 깊은 세상의 모든 주름이다.

< 고두현 기자 kd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