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메이커 태평양의 미용연구팀장 자리를 누가 맡느냐는 것은
경쟁업체들에 관심의 대상이다.

유행의 첨단을 달릴 메이크업 패턴과 컬러를 계절을 앞질러 제시하고 업계를
선도해 나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금까지 그 자리는 특유의 감성과 섬세함, 그리고 소비자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안목을 갖춘 여성전문가의 몫이었다.

태평양은 그러나 고정관념을 깼다.

"금남의 자리"로 불리우는 미용연구팀장에 남성을 앉히는 모험을 했다.

화장품업계의 "청일점" 미용연구팀장 김종일씨(42)가 바로 그 주인공.

김 팀장은 서강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81년 태평양기술연구원에 발을
들여놓은 후 20년 가까이 모발 및 피부안정테스트 등 연구에만 매달려온
인물이다.

오는 2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받을 박사학위 논문도 "에피카테신 유도체에
의한 피부 광손상 억제효과"에 관한 것이다.

미용연구팀장으로 옮긴 건 말하자면"외도"인 셈이다.

논리적 사고에 길들여진 연구원이 감성적인 미용연구 업무를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버려달라"고 먼저 주문한다.

"연구원으로 쌓아온 이성(기술 과학)을 감성(컬러 메이크업)에 접목시킨다면
오히려 재미있고 과학적 근거가 있는 새로운 미용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따라서 "외도"가 아니라 21세기 화장품산업이 나가야 할 "정도"를 걷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와함께 과학과 미용, 이성과 감성간의 조화로운 만남을 통해 "디지털드림
컴퍼니"를 구축하겠다는 태평양의 새천년 경영방침과도 꼭 부합한다고 회사
자랑까지 주저하지 않았다.

김팀장은 팀장을 맡은 지 1주일만에 고정관념 타파를 실천했다.

팀원들의 이름과 직급을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대신 "화이트" "레드" 등 각자가 좋아하는 색깔로 호칭을 부르도록 했다.

자신은 하얀색을 선택했다.

팀원 개개인의 독특한 색깔을 가감없이 투영시키기에 흰색이 제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서내에서 자연히 "미스터 화이트"로 불리운다.

김팀장은 일을 또 저질렀다.

그는 팀장을 맡은 뒤부터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여성 소비자들의 심리를 고스란히 이해하기 위해서다.

출근전 아내의 화장대 앞에 앉아 간단한 화장을 하는 게 이젠 습관이 됐다.

그는 인터뷰 도중에도 올봄 유행색상인 레드계열의 립스틱과 매니큐어를
직접 발라보이기도 했다.

그의 이렇게 고정관념 깨기에 나서고 있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외국제품 모방에만 급급했던 국내 화장품산업이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자기
색깔을 내기 위해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화장품산업은 곧 문화산업"이라고 정의하는 김팀장은 "5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독특한 전통문화는 소중한 자산"이라며 "이를 세계화하는 데 주저없이
앞장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 김수찬 기자 ksc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