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영화를 보면 어느 구석이든 각계각층의 사회봉사정신이 비쳐진다.

범죄물이나 공포물에도 그 예외가 없다.

어떤 단체에 소속됐건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또 배웠건 못배웠건, 어려운
이웃을 돕고 남을 존중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미국사회의 풍토가 결코 영화적 허구일 수 없다는 것은 현지체험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다 안다.

민원서류 하나를 떼려 관공서에 가도, 감기주사 한대 맞으러 병원을 찾아도
불친절을 다반사로 당해야 하는 우리로선 참으로 부러운 사회구조가 아닐수
없다.

그런 공공봉사 정신이 범죄가 들끓고 마약이 판을 치는 대도시의 뒷골목에도
건재함을 보여 줄 때는 그것이 영화라 해도 우리 현실이 서글퍼진다.

"비상근무"는 뉴욕 변두리병원의 구급요원이 겪는 사흘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세계 최대도시의 병든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는데 그 점에선 서울
환경이 훨씬 낫다.

마약과 매춘 등 범죄가 들끓는가 하면 불결과 가난의 때가 덕지덕지한
뉴욕의 뒷골목-행인들의 남루한 행색하며 지저분한 거리의 모습이 서울의
우범지대인들 저보다 못하랴 싶다.

그런 빈민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위태한 목숨들"을 구출하는 일이
주인공에게 주어진 임무.

격무에 지쳐있는 그는 정신상태마저 극도로 황폐해져 정작 구급차에
실려가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그는 졸다가도 호출신호만 들으면 반사적으로 구급차의 시동을 건다.

일단 현장에 뛰어들면 물불을 안가려 그의 손이나 옷은 항상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다.

이 영화는 애초부터 멸사봉공하는 말단 구급대원의 투철한 사명감과는
거리가 있는 인감탐구 드라마다.

상처입은 영혼이 어떻게 사랑을 얻어 정신적 구원을 받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와 함께 황폐된 인간들이 갖는 3류인생의 애환이 밀도있게 그려진
작품이다.

심신이 지쳐있으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주인공이나 죽음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중환자의 모습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성의 접근은 인간의 구원문제나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게
관심이 많은 프로급 영화팬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다.

보통관객의 입장에선 직무에 투철한 미국판 119구급대의 활약상으로 보는
것이 편하다.

보통관객을 감동시키는 이 영화의 요소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불찰로 꽃다운 17세 창녀의 목숨을 잃게 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잠못이루는 구조대원의 양심이며, 고양이에 물린 할머니를 치료해
주기 위해 구급차를 출동시키는 병원의 경로사상이며, 응급실에 실려온
거지행색의 중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는 히포크라테스
후예들의 박애정신이다.

우리 주변에 이렇듯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 없는" 평등의
인간애로 무장된 공공기관원 의료요원 병.의원이 얼마나 있을까.

< 편집위원 jsr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