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코리아 2000] 제2부 : (1) '국가비전부터 만들자'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과학기술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해 왔다.
과학기술력이 약해 한민족이 겪은 역사적 설움은 한두번이 아니다.
임진왜란 한.일합방 IMF 관리체제 등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들 역사적 사실의 공통된 원인은 무엇일까.
상당수 과학기술자들은 "통치권자가 과학기술에 대한 비전을 가지지 않았다
는 점"으로 분석한다.
"과학기술의 영향력을 꿰뚫어보는 통치권자가 없었던 탓에 과학기술 비전이
없었고 이는 한국이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약소국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
주요인"(호서대 화학공학과 강박광 교수)이라는 설명이다.
거북선이라는 강력한 군사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 기술이 갖는 힘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에도 한국은 일본의 신기술(총과 포)에 낡은
기술(창과 칼)로 맞서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였다는 것.
결국 20세기초 한.일 합방이라는 굴욕적인 패배로 나타났다.
과학기술의 힘을 통찰한 지도자가 비전을 제시하고 군사력을 쌓았다면
한국의 역사는 그 궤도를 달리했을 것이라는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과학기술의 힘은 국방력 증강에만 머물지 않는다.
역사는 경제력도 과학기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일본에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넘겨 주다시피 한 미국이 다시
팍스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연 것은 과학기술력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IMF 관리체제의 본질은 과학기술력의 위기"(삼성종합기술원 손욱 원장)
라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정보기술(IT)이 세계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는데도 이에 걸맞은 국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역량을 집중시키지 못한 게 외환위기의 출발점이었다는
설명이다.
21세기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과학기술은 군사력과 경제력은 물론 의식구조와 삶의 질까지 결정짓는
광범위한 사회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예견된다.
비전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전쟁터에서 깃발과 같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
"국가 경영진(내각)은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기업에 방향을 제시하고 일관된
시장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
뒤떨어진 기술 수준으로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산업연구원 박기홍 디지털경제실장은 "과학기술 후발국인 한국은 자원배분
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지 않고서는 어느 기술로도 선진국을 따라잡는게
어렵다"며 "비전을 제시해 정부 기업 학계 등의 연구역량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택과 집중"의 논리를 수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연세대 김우식 부총장은 "선진국도 다 하는 디자인 디지털 등을 육성하자는
주장이 많다"며 "창의적 틈새기술을 발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강광남 원장은 "과학기술력을 높이는게 과학자들만의
몫이 돼서는 안된다"며 "삶의 질을 높이는 현실 속에 스며 있는 과학기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는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비전은 전국민이 알 수 있고 실행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잘 살아보세"나 고 케네디 대통령의 "달에 사람을
보내자"는 비전은 피부에 와 닿는 대표적인 비전으로 꼽힌다.
비전의 부재는 가치의 위기를 낳는다.
연세대 물리학과 박승한 교수는 "주식으로 떼돈을 번 사람을 보면서 박탈감
을 느끼는 것은 일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연구개발도 마찬가지다.
전략은 "무엇(what)을 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답해 주지만 "왜(why)"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비전이 그 대답을 해준다.
장관이 바뀌거나 정권이 교체되면 흐지부지되는 일관성 없는 과학기술
정책도 국가의 백년대계를 담는 비전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일회성이나 정부 한 부처의 개별전략만으로는 세계 패권을 장악할 수
없다"(손욱 원장)
"무역수지 적자 얘기가 나올 때면 부품 및 소재 국산화를 외치다가도 곧
잠잠해지는게 현실이다"(전 산업자원부 모 국장)
그러나 비전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는 정부 주도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대우고등기술원 김한중 원장은 "구체적인 전략은 언론과 학회 등에서
자연스레 조정작업을 거치면 된다"고 말했다.
일일이 지시하고 통제하는 과거 군대식의 관료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과학기술 비전을 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개략적"
(과학기술부 문해주 서기관)이다.
비전 수립을 위해 연구평가를 선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대 재료공학부 주승기 교수는 "과거의 반성을 토대로 미래의 희망을
얘기해야 한다"며 "상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평가선진화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과학기술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지난 1995년 과기부는 2010년을 향한 비전을 내놓았다.
하지만 "세계화"에 매달린 정책의 우선 순위에 밀려 보고서만 남겨 놓았다.
지난해 12월초엔 2025년을 향한 비전을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심의 확정
했다.
문제는 각 부처가 이 비전을 정권이 바뀌더라도 변함없이 기본계획으로
수용할 것인지 여부다.
2025년을 향한 과기 비전이 "과기부 작품"으로 끝나서는 "테크노 코리아"는
요원하다.
과학기술 비전의 제시는 새천년 한국을 이끌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것이다.
< 오광진 기자 kjo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일자 ).
과학기술력이 약해 한민족이 겪은 역사적 설움은 한두번이 아니다.
임진왜란 한.일합방 IMF 관리체제 등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들 역사적 사실의 공통된 원인은 무엇일까.
상당수 과학기술자들은 "통치권자가 과학기술에 대한 비전을 가지지 않았다
는 점"으로 분석한다.
"과학기술의 영향력을 꿰뚫어보는 통치권자가 없었던 탓에 과학기술 비전이
없었고 이는 한국이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약소국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
주요인"(호서대 화학공학과 강박광 교수)이라는 설명이다.
거북선이라는 강력한 군사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 기술이 갖는 힘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에도 한국은 일본의 신기술(총과 포)에 낡은
기술(창과 칼)로 맞서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였다는 것.
결국 20세기초 한.일 합방이라는 굴욕적인 패배로 나타났다.
과학기술의 힘을 통찰한 지도자가 비전을 제시하고 군사력을 쌓았다면
한국의 역사는 그 궤도를 달리했을 것이라는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과학기술의 힘은 국방력 증강에만 머물지 않는다.
역사는 경제력도 과학기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일본에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넘겨 주다시피 한 미국이 다시
팍스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연 것은 과학기술력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IMF 관리체제의 본질은 과학기술력의 위기"(삼성종합기술원 손욱 원장)
라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정보기술(IT)이 세계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는데도 이에 걸맞은 국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역량을 집중시키지 못한 게 외환위기의 출발점이었다는
설명이다.
21세기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과학기술은 군사력과 경제력은 물론 의식구조와 삶의 질까지 결정짓는
광범위한 사회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예견된다.
비전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전쟁터에서 깃발과 같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
"국가 경영진(내각)은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기업에 방향을 제시하고 일관된
시장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
뒤떨어진 기술 수준으로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산업연구원 박기홍 디지털경제실장은 "과학기술 후발국인 한국은 자원배분
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지 않고서는 어느 기술로도 선진국을 따라잡는게
어렵다"며 "비전을 제시해 정부 기업 학계 등의 연구역량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택과 집중"의 논리를 수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연세대 김우식 부총장은 "선진국도 다 하는 디자인 디지털 등을 육성하자는
주장이 많다"며 "창의적 틈새기술을 발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강광남 원장은 "과학기술력을 높이는게 과학자들만의
몫이 돼서는 안된다"며 "삶의 질을 높이는 현실 속에 스며 있는 과학기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는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비전은 전국민이 알 수 있고 실행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잘 살아보세"나 고 케네디 대통령의 "달에 사람을
보내자"는 비전은 피부에 와 닿는 대표적인 비전으로 꼽힌다.
비전의 부재는 가치의 위기를 낳는다.
연세대 물리학과 박승한 교수는 "주식으로 떼돈을 번 사람을 보면서 박탈감
을 느끼는 것은 일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연구개발도 마찬가지다.
전략은 "무엇(what)을 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답해 주지만 "왜(why)"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비전이 그 대답을 해준다.
장관이 바뀌거나 정권이 교체되면 흐지부지되는 일관성 없는 과학기술
정책도 국가의 백년대계를 담는 비전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일회성이나 정부 한 부처의 개별전략만으로는 세계 패권을 장악할 수
없다"(손욱 원장)
"무역수지 적자 얘기가 나올 때면 부품 및 소재 국산화를 외치다가도 곧
잠잠해지는게 현실이다"(전 산업자원부 모 국장)
그러나 비전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는 정부 주도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대우고등기술원 김한중 원장은 "구체적인 전략은 언론과 학회 등에서
자연스레 조정작업을 거치면 된다"고 말했다.
일일이 지시하고 통제하는 과거 군대식의 관료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과학기술 비전을 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개략적"
(과학기술부 문해주 서기관)이다.
비전 수립을 위해 연구평가를 선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대 재료공학부 주승기 교수는 "과거의 반성을 토대로 미래의 희망을
얘기해야 한다"며 "상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평가선진화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과학기술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지난 1995년 과기부는 2010년을 향한 비전을 내놓았다.
하지만 "세계화"에 매달린 정책의 우선 순위에 밀려 보고서만 남겨 놓았다.
지난해 12월초엔 2025년을 향한 비전을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심의 확정
했다.
문제는 각 부처가 이 비전을 정권이 바뀌더라도 변함없이 기본계획으로
수용할 것인지 여부다.
2025년을 향한 과기 비전이 "과기부 작품"으로 끝나서는 "테크노 코리아"는
요원하다.
과학기술 비전의 제시는 새천년 한국을 이끌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것이다.
< 오광진 기자 kjo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