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동숭동에서 조촐한 모임이 있었다.

작가 김주영 선생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한 출판사에서 후배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선생께 드릴 헌정 소설집을 발간한 뒤 그렇게들 모인 자리였다.

내 세대의 윗선배들이 기꺼이 수고롭고 번잡한 일들을 떠맡아 준비한
자리였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때껏 나는 한번도 김주영 선생을 뵌 적이 없었다.

아마 다른 작가들도 사적으로 무슨 특별한 유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우리 문단의 큰 선배였고 어른이었다.

아마 가장 연배가 어릴 듯 싶은 나는 아무런 수고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얼굴만 내밀고 있던 셈이었다.

물론 선생의 회갑기념 헌정 소설집을 출간하기 위한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는
흔쾌히 응하긴 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내심 한켠으론 글 쓰기에도 바쁜 선배
작가들이 별 수고로운 일도 다 하는구나 하며 의아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선배들은 달랐다.

문단의 선배인 김주영 선생을 위해 원고를 모으고 책을 만들고 저녁식사
자리와 선물과 케이크를 준비하고...

그날 선생은 후배들에게 이런 당부를 하였다.

작가가 아주 혼자 작업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주위에 있는
타인들을 늘 돌아보며 살라고, 그것이 작가의 삶인 거라고.

선생이 그 말을 할 때 주위는 자못 숙연해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공연히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선생의 말을
경청하였다.

어쩌면 나는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알지 못하는 새 우리들의 그늘이었던 선생에게, 혹은 혈육 한점 섞이지는
않았지만 선생의 회갑 축하 자리를 만든 내 윗세대 선배들의 조용하고
따뜻한 움직임에 대해서?

이윽고 선생이 촛불을 훅 불었다.

누군가 폭죽을 터뜨렸다.

"대담하고 오만하며 지극히 탐미적이고 역동적 음성을 가졌지만 그러나
헐벗었으므로 애틋한 후배 작가들"을 바라보는 선생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줄기 하나를 잡아당기면 몇 개의 고구마들이 함께 딸려나오고 사과꽃도
저 혼자 피지는 않는 법이다.

세상에는 암컷과 수컷이 날개가 한짝씩이어서 짝이 되지 못하면 영영 날지
못하는 새도 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저 혼자 "작가"가 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쑥스럽고 부끄럽고 성가신 마음 때문에 그냥 지나쳤던 감사의 자리들은
어쩌면 다소 이기적이고 편협한 마음, 혹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던가 반성해
본다.

감사할 사람이 있고 감사할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건 행복한 일이다.

때로 의식이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기도 하다.

고백하건대 내 첫 소설집을 출간할 때 나는 "작가의 말"이란 것을 쓰지
못했다.

대부분의 작가들처럼 책을 내기 위해 애써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나는 어쩐 일인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보다 나이를 몇 살 더 먹게 되고부터는 두고두고 그 일이 마음에
남아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돌아오는 봄이면 다시 새 책 한권을 갖게 된다.

나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벌써부터 그 자리를 빌어 내가 감사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들을 하나 하나 기록해두고 있다.

논어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염려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는 일이
있나 염려하라"

사족이긴 하지만 선생은 그날 나에게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선생이 갖고
있는 우산 중에 한 개를 주겠다고 하였다.

(중학교 시절까지 자신의 소유로 된 우산이 없었던 선생은 지금은 무려
다섯 개의 우산을 갖고 있다고 한다. 아마 그것은 가난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 같은 것이었으리라)

틀림없이 선생은 아직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미 우산이 두 개나 있다.

선생에게 새 우산을 선물 받는다면 아마 나는 그 우산을 또 다른 사람에게-
우산이 한개도 없는 사람이면 더욱 좋겠고- 나주어줄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나눔의 시간으로 발전되고 그리하여 나와 내 옆사람의
관계가 더욱 공고해진다면 그것은 그저 단순한 마음에서 끌어낸 사소한
깨달음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어쨌거나 감사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선배가 있고 가족과 친구와 동료가
있어 때로 삶이 즐겁고, 또 그래서 아직은 살만하지 않은가.

< rebird@hite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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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제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작품집:식빵 굽는 시간, 불란서 안경원, 가족의 기원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