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사업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주식투자에 열을 올리는 다른 벤처기업
사장들이 수십억, 수백억원을 벌어들이는 것을 보면 허탈해집니다. 그들의
회사 중에는 보잘 것 없는 곳도 많거든요"

최근 만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의 P사장은 기업할 마음이 흔들린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2년여간 직원들과 날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일한 덕분에 매출 20억원
대의 회사를 일궜다.

그런데 창업한 지 1년도 안 된 후배 사장이 신생기업들에 투자해 1백억원
대의 자산가가 됐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그때부터 다른 벤처기업에 투자하고픈 유혹에 시달린다고 한다.

벤처기업인 사이에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 현상이 독버섯처럼 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빗나간 주식투자 열풍이다.

전망있는 신생기업에 투자해 거액을 거머쥔 일부 벤처기업인들이 다시
주식투자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벤처 졸부"들이 주식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연구개발에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너무 쉽게 돈을 번 탓에 사업 의욕을 잃어버린다.

최근 선배 사장과 함께 주식투자에 뛰어든 K사장은 본업에는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가능성 있는 기업 하나만 제대로 잡으면 금방 수십억원을 벌 수 있어요.
굳이 힘겹게 사업에 매달릴 필요가 있나요. 솔직히 연구개발에 몰두한다고
해서 큰 성공이 보장되는 게 아니잖아요"

K사장은 요즘 동료 벤처기업인을 만나면 사업하지 말고 주식에 손대라고
권한다고 한다.

그는 낮에는 절친한 벤처기업 사장들과 투자할 기업을 물색하러 다닌다.

K사장과 어울리는 사람 중엔 세간에 화제가 되는 유명 벤처기업인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일부 벤처기업인들은 재벌의 폐해를 그대로 답습하기도 한다.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정부의 정책자금을 독점하고 일부 돈을 빼돌려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이들에게서 "기업가 정신" (Entrepreneurship) 은 찾아보기 어렵다.

벤처의 본고장인 미국에도 벤처 갑부는 많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의 벤처 졸부들과는 다르다.

피땀어린 기술개발로 기업을 키우고 다시 회사에 재투자해 세계 최고의
기업을 만들어간다.

연구개발을 게을리하거나 한눈 파는 일이 드물다.

미국의 장기 호황을 떠받치는 벤처기업가 정신에 대해 한국 벤처기업인들은
교훈으로 삼아야 할 때다.

< 정한영 산업2부 기자 chy@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