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상 처음 만민공동회란 이름의 공공 토론 개념을 도입한 민중집회가
열린 것은 대한제국때인 1898년3월10일 서울 종로에서였다.

당시 서울 인구의 17분의 1인 1만여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즉석에서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한뒤 여러명이 등단해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했고 러시아 군사고문 재정고문을 돌려보낼 것을 결의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정책이 몇년이나마 보류됐던 것은 이같은 민중의 위력
때문이었다.

그 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의 여론을 내세워 친로수구파 정부를 박정양
민영환 등이 주축이 된 개혁정부로 바꿨으나 수구파의 반격으로 하루만에
물러났다.

또 50명의 중추원 의원 가운데 17명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선출해
등원시키기도 했다.

1898년12월에는 정부조직상의 대신급 직위 수에 맞춘 개혁파 11명을 뽑아
황제에게 천거해 사실상 새로운 개혁정부수립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목적은 러시아 일본등 외세를 업은 수구파세력을
결집시켜 계속되던 만민공동회의 시위를 12월25일 정부가 군대와 보부상을
동원해 폭력으로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독립협회도 강제 해산되고 만민공동회도 시작한지 9개월만에 좌절됐다.

서재필이 이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대중에게 민족적 자주의식과
자유민권사상을 자각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수용할 태세를 채 갖추지 못한 풍토에서 성급하고
이상에 치우친 그들의 정치개혁 좌절은 이후 대중정치운동발전에는 걸림돌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시민단체연합인 "총선연대"가 시민들의 정치참여의 장으로 내주부터 매주
수요일 "만민공동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이다.

1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 애국계몽운동형태로 정치문화를 고칠 수밖에 없을
정도인 우리 현실이 안타깝기만하다.

''신 만민공동회''가 최소한 새 선거법을 어기는 일은 없어야겠다.

물론 그들의 활동이 한국인의 고질인 편가르기를 부추겨서도 안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