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묻어 입춘이 지나갔다.

해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떠들썩하던 금년 정월도 언제 지나갔는지 이미
기억이 희미하다.

정지용 시인의 작품에 "춘설"이 있다.

"꽃피기 전 철 아닌 눈에/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라는 이 소회에는
우수절에 새삼스레 뫼뿌리에 덮인 눈을 보고 "서늘옵고 빛나"는 이마를
느끼는 신춘의 서정이 숨어 있다.

"옹승거리고 살어난 양이/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하는 그리 오래지 않은
정서가 세월을 이기고 투명해지는 까닭이 이 시에는 있다.

이 신춘의 계절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격류를 실감한다.

그런데 이 시가 눈이 멀어가는지도 모를 이 시대에 새록새록한 추억을
안겨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신을 극복하려는 나부터가 그러하거니와 먼 심산유곡의 방치된 사연,
그리고 소외된 도시 삶의 옹색함과 불편함이 함께 느껴진다.

서로 넘을 수 없는 경계 너머에서는 생명을 건 탈출의 모험이 때때로
전해진다.

그 피비린 세월 속에서 우리들의 아픔이 혹여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저어된다.

무료한 일상은 타인들의 아픔이 내 핏줄에 닿게 되면서 새삼 깨어난다.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 가장 정직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세상의 격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너무나
미흡하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미혹에 매료된다면 밀레니엄이 어디에 소용이
되겠는가.

그러니 세상을 다 바꿀 듯싶던 밀레니엄이라는 말이 자취를 감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종 거품이 판을 치는 시장이 너무나 소란해 신춘의 의미조차 찾아보기가
수월치 않다.

어지간한 귀가 아니고는 그 소음들을 잠재울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파묻혀 있다.

유행이 빠른 속도로 낡아버린 것은 다행스럽게 사행심을 버린 사람들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가 있기 때문이다.

허구를 간파하고 농락되지 않음을 증좌하는 힘은 현실인식에서 나온다.

역사와 현실에서 사이버는 허구일 뿐이다.

그것은 분명 삶이 아니며 오락일 뿐이다.

신춘은 초심을 생각하게 한다.

정지용 시인이 "조찬"에서 노래한 "서러운 새 되어/흰 밥알 쫏다"라는
숭엄한 자비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길이 나를 이기고 감히 이 시대에 대응하는 길이라 믿는다.

언어를 살리는 사람이 심산에서 세간을 찾아 흰 밥알을 쪼는 한 마리
새처럼 화두를 찾지 않고서야 어찌 자신의 땅 한평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흰 밥알을 쪼음은 조복의 다른 말이며 상생의 원이니 더욱 그러하다.

우리들 내부에 있는 고결한 새의 정신이 잊어서는 안될 게 바로 이 흰
밥알 하나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고향서 신춘을 보내고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고향서 새로운 마음을 얻고 열차속에서 눈 덮인 산천을 바라보며 돌아오는
곳이 진작에 우리가 건설해서 살아가는 도시라는 감회를 얻지않은 사람은
없었을 터이다.

그 감회는 우리가 배반적이며 일회적인 속성의 현대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다는것을 아는 "성찰"이다.

수시로 귀향과 출향을 통해 우리는 "남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선한 마음을
발견한다.

그이상 커다란 깨우침은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혼자 힘만으로 집을 장만하고 일가를 이루고 득을 보며 살아온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의 크고 작은 도움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신춘은 평범한 깨달음을 주었다.

대지적 삶의 지평을 부정하는 사이버의 사상 앞에서 여전히 위력과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이라는 점이다.

들떠 있던 사회가 조용해지면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역시 자연이다.

자연 그 자체는 밀레니엄에 대해 무심해 보인다.

그러나 문명과 인간이 늘 찾게 되는 곳은 자연이다.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배우고 무엇인가를 한없이 빌어야 하고 하나라도
얻어써야 하는 보고다.

창밖으로 고고한 산맥을 쳐다보고 쉼없이 물을 나르는 강을 내다보면서
여전히 우리를 감싸안고 씻어주며 지혜와 양식을 제공하는 자연의 부모
에게로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

그곳에만 그분들이 계시는 것 같기 때문이다.

누군가 "설악산을 따라올 수 있는 문명은 없다"고 노래했다.

문명은 낡아가지만 자연은 낡지 않는다.

문명은 빛을 만들지만 자연은 빛 그 자체다.

우리는 이미 자신과 자연의 숭엄한 자비를 찾아가는 절기 속에 와 있다.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사라진 정월처럼 다가오는 우수와 경칩의 꿈들이
우리 곁을 가상처럼 지나가고 말지도 모른다.

구각을 벗어던지는 일상의 탈출을 꿈꾸면서 봄의 자잘한 울음소리에
귀기울이는 섬세함을 갖기 바란다.

물론 세상에 어떤 고통들이 있는지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겸손의 힘을 얻어 자연을 찾는 신춘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