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모 대학에서는 문과대 6백23개 강좌 가운데 17개 강좌를 폐강하고
말았다.

학생들이 인문학 강좌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어떤 대학에서는 사학과와 철학과 지원자가 1~2명밖에 안되거나 아예 없는
지경이다.

상아탑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돈 안되는" 학문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인문학이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대학의 혼란과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회오리 속에서 인문학의 위상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관리체제 이후 불어닥친 경제논리가 대학까지 장악하면서
"철학이 밥 먹여주나"라는 자조까지 나온다.

인문학 관련 학과의 지원자 숫자마저 급감하고 있다.

대학교육의 목표가 지나치게 실용쪽으로 기울고 대학이 학원화하는 과정에서
인문학 홀대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학과 선택의 기준은 졸업후 돈을 벌 수 있느냐가 되고 말았다.

전자.컴퓨터공학이나 지식.정보화 분야처럼 취업과 관련된 학문 분야는
수업마다 학생들이 넘쳐나 선 채로 강의를 들어야 할 정도라 한다.

반면 철학이나 역사학 같은 인문학 강의에는 학생이 별로 없어 민망할
정도다.

이러한 실용학문 편중 현상은 학부뿐만 아니라 대학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이란 글을 읽어 사람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에 관한 학문이자 인간이 구성한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

사람과 사회가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담론이 바로
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인문학이 의붓자식 취급을 받고 있다.

왜 이렇게 됐는가.

우선 인문학 종사자들은 "인문학"이라는 지식 생산체계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학부-석사-박사 과정으로 이어지는 지식 생산체계가 고사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학생들이 인문대학원 진학을 꺼리면서 대학원 공동화 현상이 심화
되고 있다.

서울대를 비롯 대부분의 학교에서 이같은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그룹을 짜고 여관에서 "합숙 스터디"를 했던
1980년대의 풍경은 선배들의 무용담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학 가운데 비교적 교수자리를 구하기 수월했던 국문학 국사학 등도
대학원 지원자가 줄어들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의 경우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은 20~30%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나마 서울대는 나은편이라 한다.

사립대와 지방국립대는 대학원 존립 자체를 위협받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한다.

인문학 교수들은 "제자들이 실업자 생활을 하는 것을 보니 사람 기르기가
겁난다"고 탄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왔는가.

다양한 분석이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밖으로부터 "강요된" 위기라는 점이
문제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판정되는 지식과 학문은
실용적인 성격을 강화하라는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영.미에서도 1970~80년대부터 인문학의 위기가 논의돼 왔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특수한 원인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다.

전문가들은 학부제라는 제도적 장치가 인문학의 위기를 부채질했다고
말한다.

원래 미국식의 학부제는 학과간 벽을 허물고 지식을 다양하게 습득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어 권장할만한 제도로 꼽힌다.

교육부는 이 제도를 겉으로는 자율, 실제로는 강요를 통해 지난 2~3년 사이
전국 대부분의 대학이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교육부의 이같은 정책은 학생들이 몇몇 인기있는 학과로 몰리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학문적으로 아무리 천박해도 좋다. 수익성만 보장된다면"

이것이 오늘날의 대학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다.

여기에 정부가 당장의 연구결과와 실리를 좇는 이공계에만 집중지원을 하다
보니 인문학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후속 연구세대가 발길을 돌리는
악순환이 생겨난 것이다.

인문학자들이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학과간 벽을 높이 쌓고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 보니 인접학문간
교류에 소홀했다는 지적이 많다.

전공을 지나치게 세분화함으로써 숲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비판도 받는다.

학부란 미세한 전공 연구보다 인접학문간의 다양한 교양과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미세한 학과는 통합하고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 중심의 종합적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인문학이 재편되는 게 바람직하다.

정부도 "신지식인"양성과 정상적인 대학교육을 분리하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새 시대에 새 지식인이 필요하다고 모든 대학생을 벤처기업가로 몰아가는
정책은 단견이다.

기발한 창의력를 발휘하고 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인재는 다른 교육체계로
수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경제.기술 발전도 중요하지만 대학 지성의 핵심인 인문학의 토대 확보는
국가 발전을 위해서도 긴요하다.

세계화 물결의 한가운데 있는 미국의 경우 21세기 국가전략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인성교육이다.

"미국과학재단"( National Science Foundation )이 앞으로의 무한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의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
대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 shk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