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는 무주상보시라는 게 있다.

누구에게 왜 도와준다거나 무엇을 준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무조건 주는
것을 말한다.

"보살"의 경지에 든 고승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최고의 보시다.

일제때 도인소리를 들었던 수월선사(1855~1927)는 북간도의 어느 고개아래
토굴을 짓고 매일 짚신을 삼으며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들에게 짚신 한 켤레와
점심을 보시하다가 입적했다.

혜월선사(1862~1937)의 보살행도 유명하다.

그가 내원사에 있을 때 세마지기 남짓한 논을 마을인부들을 시켜 개간했다.

일꾼들이 그를 얕잡아보고 꾀만부리는 통에 세마지기의 논이 다섯마지기
개간하는 것보다 더 든 것을 주지가 불평하자 혜월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 바보같은 사람들아, 다섯마지기 값의 돈은 세상에 나갔으니 그대로
세상에서 이리저리 돌아갈 것이고 우리는 없던 세마지기의 논을 새로
얻었으니 무엇이 밑졌단 말인가"

수월선사나 혜월선사는 한 절에 결코 오래 머물지 않고 구름처럼 떠다녔다.

돈이 생기면 모두 나눠줬다.

무소유의 삶을 고집해 입고 있는 누더기 한 벌과 바리때 하나가 전
재산이었다.

그들에게는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이 전혀 없었다.

지난 10일 85세로 타계한 전 이화여대 장원 교수의 숨은 선행이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학교기숙사에서 지냈다.

월급은 늘 주위의 가난한 이웃과 제자들의 몫이어서 통장에 남긴 장례비
4백만원이 전재산이었다고 한다.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이 없었던 그의 삶에서는 봄볕처럼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개별적인 나의 삶만을 추구하는 경쟁의 시대속에 살고 있다.

남과의 경쟁에서 지면 죽는다는 극단적인 사고속에서 "나의 것"만을
추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간다.

세상살이에 부대끼면서 때로는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반성하면서도 병든
욕망을 실현시키려만 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자각이 들어야 남과 나눌 수 있을 텐데 그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크게 버려야 크게 얻을 수 있다는 옛 말도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