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독서에세이) '징비록'..300여년전 던진 국란경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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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환 < 한국은행 총재 >
우리나라 역사상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를 겪은 횟수는 거의 9백여회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지금의 만주족, 옛날에는 말갈 선비 여진 호족이 국경을
침입했고, 남쪽으로는 일본,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까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큰 것만 해도 고구려 때 수.당의 침입,고려 때 몽고란, 조선조 때
임진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 등 주권상실의
치욕사가 이어졌다.
광복후에는 6.25전쟁이라는 미증유의 동족상잔을 겪었고, 전쟁 못지않은
치욕의 역사로 기록될 수 있는 1997년 외환위기 때문에 IMF관리체제도
경험했다.
비록 3년만에 위기를 극복했으나 그 여파는 1백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고 수만개에 달하는 대소기업이 문을 닫았으며, 욱일승천하던 국가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당연히 외환위기 이후 국가적으로는 국회주도의 외환위기 책임청문회 등을
통한 반성도 했고, 개별적으로는 신문사 등 언론사 중심으로 수많은 기록을
남기고, 연구소와 개인적으로도 경과와 반성의 뜻을 담은 저술이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엄청난 국난이 벌어졌는데도 제3자적인 추궁과 질책은 많지만
누구도 직접 책임을 인식하고 진솔하게 반성하는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필자는 임진란 때 영의정으로서 군국정무의 중책을 짊어지고 외교
군무 민정 등에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 불세출의 역량을 펼친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임진란을 극복하게 한 서애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을 다시
읽었다.
서애선생은 서문에서 "시경에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에 근심이 있을까
삼가하노라"한 것을 교훈으로 징비록을 쓴다고 밝혔다.
이미 3백여년전에, 외환위기를 겪고도 크게 반성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 같다.
징비록은 전16권 6책인데 제1, 2권은 전쟁의 원인및 전황을 서술한 본문이며
나머지는 임금께 보낸 공문 등이다.
(1960년 부산대 한일문화연구소 이재호 교수 번역해설)
징비록의 첫째 핵심은 "나라에 기강이 문란하고 경계심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국란을 막아내기 힘들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에 비춰보면 지금 우리는 외환위기를 너무 쉽게 잊고 너무 나태해지는
것이 아닐까.
두번째는 정부나 백성이나 국란 전후에는 일치단결해야 국란을 막을 수도
극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당연한 경고이나 임진란 전에 일본의 침략불가를 주장한 김성일과 그
반대인 황윤길의 갈등, 충무공을 무고한 원균, 조야가 국방을 게을리 한
것을 경계한 것이다.
외환위기 직전에 보인 업계와 정부간의 시각차 등 우리의 짧은 시야를
질책한 것 같다.
세번째는 예비적 외교와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비록 당시로서는 조선보다 못한 일본국에 대해서도 성종 때 신숙주가
"일본과 화평을 잃지 마소서"라고 경계한 점과 이율곡의 "10만양병"론을
회고한 것이 그 예다.
외환위기 때 세계 경쟁력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국제적
지원요청에 좌왕우왕한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애선생이 징비록에서 가르친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려운 때가 지나면 책임없이 너무 쉽게 잊고, 대응을 소홀히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잘못한 데에 대한 징계도 후에 삼가는 것도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태도는 바로잡아야 한다.
결코 역량이 없거나 우리에게만 나쁜 여건이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 지방과 중소 내수산업 그리고 서민의 고통 극복은 물론
범세계적 경쟁체제 구축을 위한 구조개혁 완수와 안정.균형성장 기조를
지켜야 한다.
쓰디쓴 역사를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나 실패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렵던 때를 잊어서는 안된다.
징전비후의 경고는 예나 지금이나 진리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2일자 ).
우리나라 역사상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를 겪은 횟수는 거의 9백여회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지금의 만주족, 옛날에는 말갈 선비 여진 호족이 국경을
침입했고, 남쪽으로는 일본,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까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큰 것만 해도 고구려 때 수.당의 침입,고려 때 몽고란, 조선조 때
임진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 등 주권상실의
치욕사가 이어졌다.
광복후에는 6.25전쟁이라는 미증유의 동족상잔을 겪었고, 전쟁 못지않은
치욕의 역사로 기록될 수 있는 1997년 외환위기 때문에 IMF관리체제도
경험했다.
비록 3년만에 위기를 극복했으나 그 여파는 1백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고 수만개에 달하는 대소기업이 문을 닫았으며, 욱일승천하던 국가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당연히 외환위기 이후 국가적으로는 국회주도의 외환위기 책임청문회 등을
통한 반성도 했고, 개별적으로는 신문사 등 언론사 중심으로 수많은 기록을
남기고, 연구소와 개인적으로도 경과와 반성의 뜻을 담은 저술이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엄청난 국난이 벌어졌는데도 제3자적인 추궁과 질책은 많지만
누구도 직접 책임을 인식하고 진솔하게 반성하는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필자는 임진란 때 영의정으로서 군국정무의 중책을 짊어지고 외교
군무 민정 등에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 불세출의 역량을 펼친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임진란을 극복하게 한 서애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을 다시
읽었다.
서애선생은 서문에서 "시경에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에 근심이 있을까
삼가하노라"한 것을 교훈으로 징비록을 쓴다고 밝혔다.
이미 3백여년전에, 외환위기를 겪고도 크게 반성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 같다.
징비록은 전16권 6책인데 제1, 2권은 전쟁의 원인및 전황을 서술한 본문이며
나머지는 임금께 보낸 공문 등이다.
(1960년 부산대 한일문화연구소 이재호 교수 번역해설)
징비록의 첫째 핵심은 "나라에 기강이 문란하고 경계심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국란을 막아내기 힘들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에 비춰보면 지금 우리는 외환위기를 너무 쉽게 잊고 너무 나태해지는
것이 아닐까.
두번째는 정부나 백성이나 국란 전후에는 일치단결해야 국란을 막을 수도
극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당연한 경고이나 임진란 전에 일본의 침략불가를 주장한 김성일과 그
반대인 황윤길의 갈등, 충무공을 무고한 원균, 조야가 국방을 게을리 한
것을 경계한 것이다.
외환위기 직전에 보인 업계와 정부간의 시각차 등 우리의 짧은 시야를
질책한 것 같다.
세번째는 예비적 외교와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비록 당시로서는 조선보다 못한 일본국에 대해서도 성종 때 신숙주가
"일본과 화평을 잃지 마소서"라고 경계한 점과 이율곡의 "10만양병"론을
회고한 것이 그 예다.
외환위기 때 세계 경쟁력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국제적
지원요청에 좌왕우왕한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애선생이 징비록에서 가르친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려운 때가 지나면 책임없이 너무 쉽게 잊고, 대응을 소홀히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잘못한 데에 대한 징계도 후에 삼가는 것도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태도는 바로잡아야 한다.
결코 역량이 없거나 우리에게만 나쁜 여건이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 지방과 중소 내수산업 그리고 서민의 고통 극복은 물론
범세계적 경쟁체제 구축을 위한 구조개혁 완수와 안정.균형성장 기조를
지켜야 한다.
쓰디쓴 역사를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나 실패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렵던 때를 잊어서는 안된다.
징전비후의 경고는 예나 지금이나 진리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