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저의 집이 도시 한복판인 광화문 근처 막다른 골목에 있었어요.
여기서 나가면 보이는건 삭막한 도시적 풍경뿐이었죠. 그때 이후 제 뇌리에
쌓인 도시의 이미지들을 화면에 재배치한 셈이죠"

화려한 원색의 "칸막이 그림"으로 미술애호가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화가
황주리(43)씨가 8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에서 23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제14회 선미술상 수상작가 기념전을 겸한 전시회다.

출품작은 5백~1천호짜리 대작 5점과 소품 15점등 20여점.

황씨는 밝고 화려한 색채와 자유로운 상상력의 표현으로 20대부터 국내화단
에서 주목받아온 작가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40대 기수로서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과 표현형식
으로 우리화단을 이끌고 있다.

4년만에 다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성숙되고 깊어진 그의 화력을 느껴볼수
있는 자리다.

그가 그리는 옴니버스풍의 칸막이구조 그림속에는 도시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이나 문명의 이기들이 여러형태로 진열된다.

전화기 저울 의자 옷걸이 주전자 컴퓨터 전자계산기 빌딩등은 주로 사람의
얼굴에 자리잡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가방을 싸가지고 집을 나와 공원벤치에 앉아있는 여인이나 깃발을 흔들며
행진하는 사람, 고뇌에 가득차 담배를 피우는 사람등 화면을 지배하는 소재들
모두가 도시인들의 일상생활이다.

작가의 말대로 그의 작품은 시끄러운 지구의 표정이며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앞에서 무력한 구경꾼으로 서있을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마음
의 풍경인 셈이다.

거리에 나가 행인들의 삶을 스냅사진으로 찍어 한데 모아놓은 듯한
분위기다.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은 "맨하탄블루스"연작.

"빨강 노랑 초록등 원색을 통해 행복한 자유를 느낀다"는 황씨가 흑백으로
담은 "생활일기"다.

지난 1987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일기쓰듯 거의 날마다 하나씩 그린
성과물로 지금까지 2천5백여점이 축적되어 있으며 15개씩 한작품으로
묶여진다.

마치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이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게 하는 방대한 서사시와 같은 작품들이라 할수 있다.

홍가이 MIT대교수(예술철학)는 "칸막이속의 조그만 이미지 하나하나는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진 구상적 그림들이지만 이러한 구상적 이미지들
이 모인 작품은 한마디로 표현할수 없는 어떤 절대성을 지닌 추상의 세계"
라고 평했다.

(02)734-0458

< 윤기설 기자 upyks@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