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R열풍이 대단하다.

최신 DDR기기에 맞춰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이는 아이들을 보라.

거의 무아지경이다.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파고다공원의 노인들마저 DDR기기를 선사받고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근엄한 척하던 이 땅의 가부장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DDR에 열중하는 중년남자들은 순식간에 동심으로
돌아가 모든 세상잡사를 잊는다.

이쯤 되면 가히 국민화합의 선봉장이라 할 만하다.

DDR는 세대와 계층을 넘어 몸 가진 인간의 환희를 새삼스럽게 환기시킨다.

두 팔, 두 다리가 만들어내는 지복의 행위 앞에서 인간은 모두 똑같을
뿐이다.

아마도 DDR열풍은 인간의 이 오래된 본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심장의 고동소리와 삶의 맥박에서 비롯된 인간의 원초적인 리듬감각은
세월을 거듭하는 가운데 마침내 춤이라는 최고도의 표현형태로 굳어졌을
것이다.

긴 겨울을 견디고 드디어 삐죽 고개를 내민 어린 새싹을 만났을 때,
얼어붙었던 강물이 다시 졸졸졸 흐르는 것을 들었을 때, 사랑하는 그녀가
나에게 미소를 보내올 때, 어느 누가 기뻐 춤추지 않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춤은 언어 이전의, 언어를 넘어서는 종족적 기억의 창고다.

뛴다, 구른다, 내디딘다, 벌린다, 흔든다...

인간은 이 단순한 행위의 반복 속에서 현재의 자기를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인간, 그의 환희와 대면하는 것이다.

물론 DDR기기가 과연 그러한 자기발견을 가능하게 하는지는 의문이다.

일단 그것이 육체의 존재 자체를 망각한 현대인에게 몸의 건재함을 일깨워
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나아가 그것이 이제는 낯선 것이 돼버린 춤의 문턱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사제와 다를 바 없다는 데도 이의가 없다.

웬만한 엉터리가 아니라면 DDR기기를 따라함으로써 춤 비슷한 동작을
만들어 보이는 데 실패할 까닭이 없다.

DDR기기만 있으면 언제라도 DJ와 함께 춤을 출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DDR를 하면서 땀을 훔치는 국회의원 후보들과 그들의
참모들을 신물나게 볼 것이다.

그것은 그 후보의 대중성과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제고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모두가 DDR 덕분이다.

그것은 단순히 춤의 혁명을 넘어 삶의 혁명을 넘본다.

DDR는 춤추는 낙원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DDR가 만들어내는 춤은 춤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DDR를 하고 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춤을 추고 있다고 착각한다.

춤이 필요한 순간 우리는 DDR를 통해 언제든지 춤을 급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춤이 진정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바로 그 춤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DDR는 우리를 기만한다.

그것은 춤의 가상으로 춤을 대신한다.

단추만 누르면 언제든지 튀어나올 준비가 돼 있는 춤,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춤, 어느 누구도 외면하지 않는 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욕망의 포로다.

정치인은 춤 대신 빵을, 학자는 그 자리에 관념을 끼워 넣을 뿐 우리가
꿈꾸는 욕망 자체는 동일하다.

DDR는 이러한 인간 욕망이 다다른 바벨탑이다.

바벨탑을 완성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결코 완전하게 성취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욕망의 빈틈에 그것을 닮은 이미지들만을 무한히 복제해낼
수 있을 뿐이다.

거대한 놀이동산이 만들어진 이후 진정 놀이다운 놀이가 불가능해졌고
삼천리 방방곡곡에 노래방이 생긴 이래 끝내 노래다운 노래를 들어볼 수
없게 됐다.

DDR의 등장과 더불어 이제 우리는 드디어 춤을 잃을 차례가 됐다.

과거 한 때 우리는 놀이와 노래와 춤을 모두 가진 적이 있었다.

또 과거 어느 한 때는 그 모두를 잃은 슬픔에 한탄하며 우리의 미래를
비관한 적도 있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복제품들만을 가득 채워
넣고 있다.

모조품 숲에 갇혀 우리는 과거 어느 한 때의 결핍마저 잊었다.

청룡열차와 노래방과 DDR는 뻔뻔스러운 정치인처럼 여기는 낙원이라고
속삭이기만 한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자신이 사랑하는 왕자를 보기 위해 바다 속 화려한
궁궐과 아름다운 목소리, 그리고 유려한 지느러미를 잃어야했다.

그러나 왕자는 인어공주가 어떻게 자신 옆에 있게 됐는지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이 동화 속 왕자를 닮았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인어공주가 거품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도 정녕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동화 속 왕자처럼 아무 것도
모르게 될 것이다.

< ssjjjs@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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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경원대 강사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