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서울전시] 28년만의 외출 .. 해외나들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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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모나리자는 방탄유리로 특별 보호를 받고 있다.
모나리자가 프랑스로 오게 된 것은 16세기 이탈리아 원정을 갔던 프랑스와 1세가 문예부흥을 위해 다빈치를 국빈으로 초청하면서다.
모나리자에 대해 강한 애착심을 갖고 있던 다빈치는 이 작품을 조국에 남겨 두지 않고 프랑스로 가져왔다.
당시 금화 4000에쿼를 지불하고 다빈치로부터 모나리자를 구입한 프랑스와 1세는 자신의 목욕탕에 걸어 두고 작품 감상을 즐겼다.
이어 루이 14세의 환궁으로 베르사이유로 옮겨진 모나리자는 왕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미술품 창고에 방치되기도했다.
19세기초 나폴레옹 1세는 파리 시내 튈리리궁의 침실에 모나리자를 걸었다.
왕실 전용 소장품 모나리자가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된 것은 프랑스 혁명 4년후인 1793년이다.
1880년대 모나리자 사진을 담은 그림엽서가 나오며 다빈치의 걸작은 프랑스 인기 관광상품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모나리자만큼 많은 수난을 겪은 예술품도 많지 않다.
17세기 영국의 찰스 1세는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며 모나리자를 혼례품으로 가져올 것을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1년에는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던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루브르 박물관 복원 공사장 인부로 일하던 이탈리아계 페루지아가 경비원의 감시 소홀을 틈타 모나리자를 훔친 것이다.
그는 유유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모나리자를 2년간 장롱에 보관했다.
1913년 귀국한 그는 로마 미술상과 작품 흥정을 하다 체포됐다.
당시 그는 이탈리아 예술인이 탄생시킨 걸작을 조국으로 가져오기 위한 애국행위라고 주장했으나 자백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았다.
이탈리아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모나리자를 프랑스로 순순히 돌려 보내지는 않았다.
1년간의 전국 순회 전시회를 가진 후에야 루브르 박물관으로 귀속시켰다.
모나리자로서는 이탈리아 전시가 4백년만의 귀향이자 첫 외국 나들이였다.
그리고 2차대전 동안은 독일군의 폭격을 피해 프랑스 여러 지방으로 수차례 피난을 다녀야만 했다.
종전 후 루브르로 되돌아 온 57년에는 한 볼리비아 정신이상자의 돌세례를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모나리자가 처음으로 외교사절의 임무를 수행한 것은 60년대 초반.
제5공화국 드골 대통령 시절 문화부 장관을 지낸 대문호 앙드레 말로는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재키 케테디의 제안에 따라 모나리자에게 외교 특명을 내렸다.
루브르 박물관 실무자들은 모나리자의 해외여행을 극구 반대했지만 말로 장관의 강한 의지로 첫 공식 외국 나들이가 이뤄졌다.
워싱톤 내쇼날 갤러리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전시된 모나리자는 국빈대접을 받았다.
철저한 보안 경비로 관람객은 3분이상 작품앞에 서있지도 못했다.
이어 10년 후 프랑스는 일본 정부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다시 한번 모나리자의 해외 출장을 허락했다.
하지만 문제는 구 소련 영공을 어떻게 통과하느냐는 것.
크레믈린은 영공통과 조건으로 소련 전시회를 요청했다.
일본과의 외교 관계로 볼때 이미 예정된 일본 전시회를 취소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결국 소련 요구를 받아들였다.
모나리자는 구소련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일본은 온도와 습도가 자동조정되는 특별 유리 액자에 모나리자를 모셨다.
러시아는 구동독 미술품 복원 전문 기술자들을 불러 전시기간동안 작품옆을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74년 프랑스 정부는 모나리자의 일본 여행을 앞두고 마지막 해외 전시회라고 했다.
그후 아직도 그 약속은 지켜져 왔다.
2002년 한국 전시회가 이뤄진다면 이는 모나리자의 3번째 공식 외국방문이자 28년만의 외출이 되는 셈이다.
< 파리=강혜구특파원 hyeku@coom.com >
모나리자가 프랑스로 오게 된 것은 16세기 이탈리아 원정을 갔던 프랑스와 1세가 문예부흥을 위해 다빈치를 국빈으로 초청하면서다.
모나리자에 대해 강한 애착심을 갖고 있던 다빈치는 이 작품을 조국에 남겨 두지 않고 프랑스로 가져왔다.
당시 금화 4000에쿼를 지불하고 다빈치로부터 모나리자를 구입한 프랑스와 1세는 자신의 목욕탕에 걸어 두고 작품 감상을 즐겼다.
이어 루이 14세의 환궁으로 베르사이유로 옮겨진 모나리자는 왕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미술품 창고에 방치되기도했다.
19세기초 나폴레옹 1세는 파리 시내 튈리리궁의 침실에 모나리자를 걸었다.
왕실 전용 소장품 모나리자가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된 것은 프랑스 혁명 4년후인 1793년이다.
1880년대 모나리자 사진을 담은 그림엽서가 나오며 다빈치의 걸작은 프랑스 인기 관광상품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모나리자만큼 많은 수난을 겪은 예술품도 많지 않다.
17세기 영국의 찰스 1세는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며 모나리자를 혼례품으로 가져올 것을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1년에는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던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루브르 박물관 복원 공사장 인부로 일하던 이탈리아계 페루지아가 경비원의 감시 소홀을 틈타 모나리자를 훔친 것이다.
그는 유유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모나리자를 2년간 장롱에 보관했다.
1913년 귀국한 그는 로마 미술상과 작품 흥정을 하다 체포됐다.
당시 그는 이탈리아 예술인이 탄생시킨 걸작을 조국으로 가져오기 위한 애국행위라고 주장했으나 자백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았다.
이탈리아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모나리자를 프랑스로 순순히 돌려 보내지는 않았다.
1년간의 전국 순회 전시회를 가진 후에야 루브르 박물관으로 귀속시켰다.
모나리자로서는 이탈리아 전시가 4백년만의 귀향이자 첫 외국 나들이였다.
그리고 2차대전 동안은 독일군의 폭격을 피해 프랑스 여러 지방으로 수차례 피난을 다녀야만 했다.
종전 후 루브르로 되돌아 온 57년에는 한 볼리비아 정신이상자의 돌세례를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모나리자가 처음으로 외교사절의 임무를 수행한 것은 60년대 초반.
제5공화국 드골 대통령 시절 문화부 장관을 지낸 대문호 앙드레 말로는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재키 케테디의 제안에 따라 모나리자에게 외교 특명을 내렸다.
루브르 박물관 실무자들은 모나리자의 해외여행을 극구 반대했지만 말로 장관의 강한 의지로 첫 공식 외국 나들이가 이뤄졌다.
워싱톤 내쇼날 갤러리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전시된 모나리자는 국빈대접을 받았다.
철저한 보안 경비로 관람객은 3분이상 작품앞에 서있지도 못했다.
이어 10년 후 프랑스는 일본 정부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다시 한번 모나리자의 해외 출장을 허락했다.
하지만 문제는 구 소련 영공을 어떻게 통과하느냐는 것.
크레믈린은 영공통과 조건으로 소련 전시회를 요청했다.
일본과의 외교 관계로 볼때 이미 예정된 일본 전시회를 취소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결국 소련 요구를 받아들였다.
모나리자는 구소련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일본은 온도와 습도가 자동조정되는 특별 유리 액자에 모나리자를 모셨다.
러시아는 구동독 미술품 복원 전문 기술자들을 불러 전시기간동안 작품옆을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74년 프랑스 정부는 모나리자의 일본 여행을 앞두고 마지막 해외 전시회라고 했다.
그후 아직도 그 약속은 지켜져 왔다.
2002년 한국 전시회가 이뤄진다면 이는 모나리자의 3번째 공식 외국방문이자 28년만의 외출이 되는 셈이다.
< 파리=강혜구특파원 hyeku@coo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