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채무규모를 둘러싼 여야의 공방이 뜨겁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국가채무규모가 4백조원이 넘는다고 주장하고 나서자 여당인 민주당은 정부통계를 들이대며 "말도 안되는 부풀리기"라고 거센 역공을 퍼붓고 있는 중이다.

사실 우리 경제의 재정적자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이를 시정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입씨름이 과연 재정건전화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일인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그간의 진행과정을 보면 논쟁의 초점이 빗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누구를 위한 공방이고,과연 생산적인 행태인가를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양쪽이 들이대는 통계의 근거는 다를게 없다.

다만 정부가 행한 여러가지 경제행위 가운데 어디까지를 국가채무로 보느냐는 기준설정이 다를 뿐이다.

한나라당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직접 빌려 쓴 1백11조8천억원에 금융구조조정채권등 정부가 지급보증을 선 90조2천억원,국민연금 급여 등 잠재적 채무 1백86조원,그리고 앞으로 추가부담이 예상되는 공적자금 20조~40조원 등을 합쳐야 하기때문에 국가채무규모는 최대 4백28조원에 달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직접 빌려쓴 채무만 국가채무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그 규모는 1백8조원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보증채무나 국민연금 등 잠재적 채무는 정부가 얼마를 부담해야할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인데다 공적자금의 추가투입은 그 필요성 여부가 검토되지도 않은 사안이라는 설명이다.

국가채무를 어떤 기준으로 파악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않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IMF 기준은 "국가가 차주로서 직접 상환의무를 지며,상환금액이 확정된 채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의 국가채무는 1백8조원인 셈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보증채무를 계산에 넣는다 하더라도 4백조원이 넘는다는 한나라당 주장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더구나 문제의 본질이 판단기준인데도 채무규모에만 논란의 초점이 모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근의 국가부채 급증은 IMF사태로 불리는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극심한 경기침체를 극복하면서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돼있다.

때문에 정치적 책임을 따지자면 여야를 가릴 것없이 어느 정당도 자유로운 처지가 아니다.

더구나 전 정권을 담당했던 한나라당이 IMF 극복 과정에서 늘어난 국가채무를 총선쟁점으로 제기해 입씨름을 벌이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다.

지금은 부채규모에 대한 공방보다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건전재정으로 되돌릴수 있느냐가 국가적 과제이자 국민들의 관심사다.

따라서 지금은 각 정당이 얼마나 실효성있는 해법을 제시하고,그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논쟁의 초점이 맞춰지는게 훨씬 생산적이다.

정책공약에 재정적자를 부추기는 선심정책은 없는지,국민들의 세금부담은 적정한지,정부가 제시한 채무상환 계획은 제대로 이행될수 있을는지,이런 것들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공방이 이뤄지는게 바람직하다.

자칫 잘못된 기준으로 채무규모가 부풀려진다면 국제신인도에도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없지 않다는 점도 유의할 대목이다.

미국경제학회 회장을 지낸바 있는 노스웨스턴대학의 아이스너 교수와 같은 학자들은 재정적자가 경제에 해악을 끼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선 안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재정적자 한가지만 보면 좋지못한 결과이지만 국민경제 전체에는 득이 될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현상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부분이 옳기 때문에 전체도 타당하다"는 이른바 "구성상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번 정부채무 규모를 둘러싼 여야의 공방도 그런 측면은 없는지 한번쯤 반성해볼 일이다.

사실 국가경제나,가정경제나 빚이 많다는 것은 위험스런 일이다.

더구나 지속적으로 적자가 누적된다면 국가경제가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그런 점에서 우리경제의 재정건전화 목표는 더욱 확고히 다져져야 한다.

또 국민적 관심사인 재정운용에 대해 정치권이 공방을 벌인 것도 환영할만한 일이다.

다만 과거지향적인 규모시비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인 정책대안제시에 치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국민들의 진정한 기대다.

그러나 여야를 막론하고 한쪽으로는 건전재정을 약속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세금을 깎아주고 각종 예산지원을 대폭 늘려주겠다는 식의 모순된 공약을 남발하고 있는 정치현실을 보면서 국가부채에 대한 걱정은 말로만 떠드는 것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