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색의 조화가 힘을 받았다.

새순의 연록을 뒤에 깔고 형형색색 무리져 찬란한 생명을 다투어 노래한다.

도심 한복판에선 변주가 시작됐다.

개나리와 목련이 스타카토를 끊고 어느새 대합창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는 전북 고창 선운산(도솔산) 자락의 선운사.

이곳은 요즘 핏빛 독주의 울림으로 가득하다.

반질거리는 동백무리 잎새 틈으로 진홍의 꽃송이가 애절한 울음을 토해내고 있다.

선운사 일대는 동백자생지의 북방한계선.

때문에 한반도에선 가장 늦게 붉은 얼굴을 내밀어 춘심을 자극한다.

해마다 4월 중.하순께 만개, 화려한 봄색의 제전에 마침표를 찍는다.

선운사에는 동백 3천여 그루가 군락(천연기념물 184호)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을 호위하는 산비탈 5천여평을 30m 너비로 가로질러 빼곡히 메우고 있다.

언제 누가 심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운사가 창건된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이후에 심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수령은 5백~6백년이 넘는 것으로 어림된다.

선운사의 원공 스님은 이 동백무리에서 조상의 지혜를 엿본다.

"산불로 도량전체가 위험에 빠진 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불이 잘 붙지 않아 방화림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동백을 심은 이유를 헤아릴 수 있지요. 자연으로 자연을 다스리자는 것이었죠"

기능림으로서 동백무리를 물들이는 붉은 꽃망울은 상춘객들에게 묘한 여운을 안긴다.

봄빛의 화사함을 반기는 가슴속에 남모를 애절함을 교차시킨다.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예요/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눈물 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예요/.../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 처럼 하도 슬퍼서/당신은 그만 못떠나실 거예요"(송창식의 "선운사")

노랫말 끝의 여운은 동백꽃이 질 때 처절해진다.

붉게 타올랐다가 목이 부러지듯 송이째 툭 떨어져 버린다.

그 핏빛으로 절규하는 듯한 모습이 잔인할 정도다.

어떤 이는 이를 보고 "청춘의 피꽃"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동백은 꽃이 만개했을 때와 떨어질 때 두번은 봐야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선운사의 붉은 색 향연은 대웅전 옆 앵두나무로 이어진다.

새하얀 꽃이 6월께면 앙증맞은 빨간 앵두로 익어 경내를 점점이 수놓는다.

그리고는 애절한 전설의 "상사화" 차례다.

선운사 일대와 마애불이 있는 도솔암까지 3km에 이르는 골짜기 주변주변 무리져 장관을 이루는 비련의 꽃이다.

진초록의 여름까진 40cm 껑충한 대롱으로 있다가 9월말~10월초 불꽃놀이 폭죽터지듯 갈래진 붉은 꽃을 틔워 "불세계"를 이룬다.

스님을 연모했던 여인이 죽은 자리에 피어났고 봄 잎이 여름에 진 뒤 꽃이 나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전설에서 이름붙여진 선운사의 또다른 명물이다.

김재일 기자 kjil@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