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정치에 혐오를 느낀다고 했는가.

점점 뜨거워지는 선거전을 지켜보며 필자는 정치의 묘미를 즐긴다.

이번 선거는 정당들이 신장개업을 하고 새 피를 수혈한다고 법석을 떨며 서막이 열렸다.

요즘은 선거전에 나선 후보자들 얘기,그들이 흘리는 소문과 가십,여야 대변인들이 속 뒤집어 놓는 독설,듣기 달콤한 공약 등 모두가 나름대로 재미있다.

이제 시민단체들이 새로운 심판자로 등장하면서 열린 2막이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

미국이 남북전쟁을 끝내고 나서 치른 선거는 난장판이었다.

대다수의 남부 백인들은 선거를 보이코트했다.

흑인들은 노예에서 해방돼 투표권을 얻었지만 대다수는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

이때 북부의 건달들이 남부로 몰려가 흑인들에게 북부에서 온 구세주처럼 행세해 표를 모아 정치인이 되려고 난리를 피웠다.

이들을 카펫배거 (carpetbagger) 라고 한다.

카펫배거란 원래 영국에서는 선거구에 살지 않는 뜨내기 국회의원을 일컫는다.

실제로 상원의원까지 지낸 조지 스펜서는 목화밀수로 돈을 번 전형적인 카펫배거였다.

게다가 남부지역의 백인 공화당 출마자들을 스캘러왜그 (scalawag :건달이란 뜻)라 경멸하며 일종의 지역적 배신자란 낙인을 찍어 낙선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지금 우리의 선거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후보자들의 신상명세가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국민을 봉으로 알고 덤벼든 소위 한국판 카펫배거들의 면모가 밝혀졌다.

후보자들 대다수가 고매한 우국지사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까놓고 보니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은 후보들이 태반이고 자신은 물론 아들까지 군대에 보내지 않은 얌체족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게다가 갖가지 전과기록을 갖고 있는 후보자들도 많다.

아연할 따름이다.

영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즈 (noblesse oblige) 라는 말은 귀족이나 상류층 신분의 사람들이 사회에서 대접받는 만큼 도의상의 의무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전쟁 때 귀족 자녀들이 서민층 자녀들보다 전사한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들 스스로 위험한 임지를 자원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은 우리사회의 귀족이다.

응당 누구보다도 투철한 국가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세금을 정당히 내고 병역 의무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벽보에 얼굴을 내붙이고 표를 달라고 하는 그들 상당수가 카펫배거였단 말인가.

지역감정에 불이 붙으면서 지역마다 배신자 논쟁도 심상치 않다.

게다가 수입이 없다고 세금도 제대로 안낸 사람들이 돈을 풀어 놓고 있다.

선거기간동안 어림잡아 조 단위의 돈이 풀릴 것이다.

그동안 정치개혁법을 만들어 "돈 안드는" 정치를 한다고 다짐했지만 여야가 속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말 뿐이었다.

필자가 영국에서 경험한 선거는 조용한 축제였다.

플래카드도 없고 벽보도 없다.

동네마다 벌어지는 유세도 없다.

요란한 팸플릿도 구경하지 못했다.

선거비용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반면 중앙당에서 유세를 하는데 주로 신문과 텔레비전 같은 매스컴이 이용된다.

정당의 홍보자료는 유료로 서점에서 팔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선거는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소모전이다.

선거전의 양상은 후보자들의 자질과 상관이 깊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학연 지연을 표로 묶는 방법은 물론 등산모임,티 파티,상갓집 돌기 등 득표작전에 관한 한 우리가 1등 선진국이 아닐까.

뿐인가.

핑크빛 헛소문내기,봉투 돌렸다 되돌려치기 등 상대방의 표깎기 작전도 점점 다양해지고 요즘은 감시하는 선관위원들이 봉변을 당할 정도로 과열됐다.

참으로 선거 때마다 너무 많은 사회의 에너지가 낭비된다.

돈이 쏟아지니 인플레가 걱정이다.

많은 인력이 선거판에 동원되니 공장은 일손이 달린다.

관공서는 일을 중지하고 오히려 선거의 관객이 돼 있다.

이래서 당장 처리해야 할 민원사항이 잠자고 있다.

당연히 선거후의 후유증도 걱정된다.

선의의 경쟁은 발전을 위한 약이지만 격렬하게 우격다짐을 하고 나면 뒤가 깨끗할 수 없는 것이다.

선거자체가 소모전이다.

소모적인 비용,소모적인 논쟁,소모적인 아귀다툼,소모적인 폭로,소모적인 공약 등으로 얼룩이 진다.

윈스턴 처칠은 말년에 "나는 열네번 선거에 출마해 싸웠는데 그때마다 내 수명이 한달씩 감수됐다.

우리의 짧은 생애를 생각할 때 이렇게 힘든 싸움 때문에 14개월을 헛되이 보냈다는 것은 우울한 일"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선거를 치러야 한다.

시민단체가 앞서가고 있지만 최종적으로 후보자들의 자질을 판단하는 것은 국민들이고 또 선거로 인한 사회비용도 국민들의 몫이다.

gyl@madang.ajo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