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년전 워드 프로세서를 처음 쓰게 된 날을 잊을 수 없다.

그 물건은 내가 쓰고 있던 수동 타자기와는 도대체 비교할 수가 없었다.

화이트로 오자를 지울 필요도 없고 문장을 내 맘껏 편집할 수 있었으며 감열지를 끼우면 그 즉시 인쇄까지 됐다.

그날 나는 밤늦도록 자판을 두드리며 싱글벙글 좋아 죽었다.

아하 참 신기하구나.

어떻게 이렇게 똑똑한 게 다 나왔을까.

그러니 처음 486컴퓨터를 쓰게 된 날은 말해 무엇할까.

그때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처럼 내 눈은 신기함과 설렘으로 빛났었다.

그날밤 컴퓨터 전원을 끄며 어린날의 나를 떠올렸다.

지금부터 30여년 전의 일이다.

그때는 저녁 먹고 흑백 TV 앞에 모여 앉아 "웃으면 복이와요"나 "수사반장"을 보는 것이 그럴 듯한 오락거리였던 시절이었다.

호기심 왕성한 내가 TV앞에서 궁금증이 발동하지 않을 리 없었겠다.

MBC방송국에 있다는 구봉서 최불암 아저씨가 어떻게 우리집 TV상자에 나올까나.

아이다운 탐구심에 휩싸인 나는 아버님께 묻는 대신 혼자 연구를 했다.

제법 한숨까지 쉬어가며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던 나는 결국 수사반장은 우리집 지붕 안테나를 타고 내려와 TV에 이어진 전깃줄 속을 따라나와 화면에 나타난 것이라는 엉뚱하면서도 자신없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전깃줄도 없는 라디오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저 조그만 상자에서 어떻게 나훈아 노래가 나오고 김삿갓 방랑기가 나올까.

아버님에게서 주파수니 송수신이니 하는 개념을 처음 듣던 날,나는 라디오를 품에 안고 침대 밑이나 장롱속에 꼭꼭 숨어 주파수를 맞춰보았다.

물론 나훈아 노래는 잘만 나온다.

그 캄캄한 장롱속에서 나는 감탄한다.

아아 세상에.

남산 방송국은 내 라디오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전파를 보냈을까.

나는 축음기를 처음 본 남태평양의 원주민처럼 믿을수 없는 얼굴이 된다.

친구들은 엉뚱한 데에 감격을 잘하는 나를 지진아 보듯 딱하게 여겼다.

라디오는 원래 그런 거야.

텔레비전도 원래 그래. 그렇다하더라도 짱구머리 그 아이에겐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다.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에 뜨나.

천둥은 어디서 치나.

둥근 지구의 저 반대쪽 바닷물은 어떻게 아래로 쏟아지지 않나.

세상 모든 아기들은 어떻게 생겨났나.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

영혼이란 무엇인가.

어느날은 붉은 보자기를 둘러쓰고 황금박쥐 행세를 하며 서랍장에서 뛰어내리다 발목을 삔적도 있었다.

그후 타임머신을 타고 온듯 30대 후반이 됐다.

이따금 길고 어지러운 꿈에서 깨어난 듯 피로하고 호기심에 딱딱한 식빵처럼 굳어지는 것을 느낀다.

당연히 그다지 많은 것에 신기해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은 책을 읽어치웠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생의 많은 비밀을 알아버렸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내 생에서 변경할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아닌 것은 또 무엇인지.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에 뜨는지.

아기들은 어디서 생겨나는지.

지구 반대편 바닷물은 왜 쏟아지지 않는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됐다.

오늘도 인터넷에 들어가 필요한 책을 주문하고 멀리 있는 친구와 메일을 주고 받지만 그건 신기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별일도 아닌데 누군가 아아 신기하다,호들갑이면 나는 점잖게 면박을 준다.

그게 신기한 거냐.

당연한 거지.

별일도 아닌데.

누군가 집요하게 궁리하면 어른처럼 타이른다.

됐네 이 양반아.

그거 몰라도 사는데 지장없네.

아아,하지만 오늘 나는 그립다.

라디오를 품에 안고 장롱속에 들어가던 시절.

워드 프로세서 자판을 두드리며 싱글벙글 좋아 죽던 시절.

보자기를 둘러쓰고 황금박쥐 행세를 하던 시절.

무엇이든 왜인지 어떻게 인지 신기해하던 시절.

그러니 마감을 지켜야할 원고와 읽어야할 책과 일상의 번잡한 의무에서 잠깐 눈을 들어 창밖의 저 놀라운 벚꽃나무를 보아라.

지상의 생명이란 생명이 일제히 탄성을 질러대는 이 봄날.

잊었던 탄성을 흘려 보아라.

저것 좀 봐라.

만발한 봄도,꽃나무 아래 환한 꽃그늘도.

봄이면 잊지 않고 돌아와 재재거리는 작은 새들도.

어린날 라디오와 TV앞에서처럼,10년전 워드 프로세서 앞에서처럼,세상에 나온지 몇해 안되는 어린이처럼 감탄해보아라.

이야,신기하구나.

그리고 말해봐라.

그많던 호기심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hannak3@ 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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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

<>소설가
<>이화여대 정외과 졸업
<>장편소설 "마당에 봄꽃이 서른번째 피어날때""나의 아름다운 빵집" 창작집 "사랑이 나를 만질때"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