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황무석은 다방을 나와 시낭송회장으로 갔다.

낭송회장 안에는 스무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소녀가 연단에 서 있었다.

기업의 도산으로 일자리를 잃어 어려움을 겪었던 가족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시로 둔갑되어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장내는 숙연한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었다.

뒤이어 또다른 소녀가 연단에 나섰다.

악에 받친 목소리로 투쟁 각오를 담은 시를 장내가 떠나가도록 낭송했다.

황무석은 등골이 오싹해옴을 느꼈다.

그 다음 내빈의 시낭송 차례라고 사회자가 알려주었다.

첫번째 내빈으로 권혁배 의원이 거명되었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앞쪽에 있는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는 것조차 지쳤는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회자는 서너 차례의 호명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소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웅성거리는 장내 한쪽 구석에 발붙일 틈도 없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 노동자들 사이가 벌어지면서 길을 비집고 걸어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옆구리에 누런 서류봉투를 끼고 이마를 덮은 텁수룩한 머리를 오른손으로 치켜올리면서 고개를 숙인 채 군중 속을 겨우 빠져나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이상을 먹고사는 순진한 학생처럼 보였다.

바로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들의 지도자상인 것이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서서히 단상에 올라왔다.

"존경하옵는 노동자 여러분,그리고 각계 각층의 내빈 여러분! 오늘 시낭송회를 맞이함에 있어 먼저 저는 무한한 감회가 서림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지난해 말 노동법 개정안이 여당단독으로 날치기 통과된 이후 우리는 끊임없는 투쟁을 했습니다.

노동법 개정안의 핵심은 정리해고제의 도입이고 정리해고제가 도입되면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 내몰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투쟁했고 결국 우리는 이겼습니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하며,그럼 시를 낭송하겠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마수" 김남주 라고 말한 후 시낭송을 시작했다.

"무릎까지 들어간 농부의 허벅지에서/피를 빨아 피둥피둥 살이 찐 거머리 같은 놈/노동자의 등에서/이윤을 짜내고 그 위에 다시/거부를 쌓아올린/흡혈귀 같은 놈/이들을 등에 업고/야수적 공격으로 인간의 이성을 파괴하고/끊임없이 끊임없이 끊임없이/날조된 허위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안보라는 이름으로 테러적 탄압으로/민족의식을 마비시킨/산적 같은 놈//몸에 칼이 들어가야 놈들은/착취.수탈.억압의 마수를 놓는단 말이다" 권혁배의 감정에 북받친 시낭송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장내는 금세 환성의 도가니로 변해버린 듯했다.

황무석은 자신이 거머리가 되고 흡혈귀가 되고 산적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황무석은 얼른 뒤돌아 시낭송회장을 나왔다.

다방에 다시 가 있기로 했다.

그곳에 더 있다간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칠지도 몰라서였다.

권혁배 의원의 시낭송과 연기는 그토록 훌륭했다.

황무석은 다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