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을 함께 쓰는 동료가 얼마 전 명예퇴직을 하더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전직 디자이너,학원선생,구성작가,그리고 전직 교사 일행이 두달간,무려 열일곱 나라를 돈다는 야심찬 계획이라나.

좁은 원룸은 금세 지도와 여행 안내서로 뒤덮이고 머리를 맞대고 일정을 짜던 네사람은 이윽고 떠나기 전 팔아야할 자동차의 시세를 묻느라,유레일 패스를 예약하느라,강아지를 맡길 사람을 물색하느라 저마다 휴대폰을 들고 사방팔방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쓰던 원고를 단념하고 카드게임을 불러냈다.

엉뚱한 배열의 카드를 순서대로 맞추는,그 단순한 놀이를 십분쯤 하노라면 머리속도 그처럼 단순해지곤 했는데 그날 따라"더이상 이동할 카드가 없습니다"하는 지문이 번번이 나를 약오르게 했다.

"야,서선생 삐졌나보다"

동료가 말하자마자 다른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내 속을 긁기 시작했다.

"너야 써야 할 원고 있지,기다리는 애들 있지,즐비한 강의에다,잠시도 몸을 뺄 수 없는 사람 아니냐,우리랑은 다르다,진짜 중요한 인물이다..."는 그 모든 말이 내게는 "매롱,약오르지"로만 들렸다.

시무룩해 있는 내게 동료가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너는 발목 잡는 게 참 많기도 하다"

느지막이 집에 돌아 온 나는 때 아니게 큰 아이의 더부룩한 머리를 이발기로 다듬어주고 샤워를 하다말고 욕조와 바닥에 낀 물때를 박박 닦아냈다.

내친 김에 부엌 타일과 싱크대,오븐,냉장고 할 것 없이 청소를 마치고 나니 새벽 세시였다.

쿡쿡 웃음이 나왔다.

프라하,도나우강,베르사이유...

이름조차 아름다운 곳으로 떠날 그들이 부러운 것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약이 오르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하얗게 머리가 셀 때까지 그 나라들을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벚꽃 만발한 윤중로 한번을 나가지 못하는 처지이므로.

하지만 어쩌겠는가,반짝이는 타일벽 하나로 이처럼 기분이 가쁜해지는 것을.

거실의 불을 끄기 전 나는 깨끗한 벽에 반짝 빛이 반사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발목 잡혀 사는 많은 이들의 눈빛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