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향기가 바람에 날리는 이른 아침.서울 강남에 있는 영동아파트 앞.버스가 설 때마다 서너명의 장정이 내린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한 아파트로 들어선다.

10여명 모두 작업복 차림.옷에는 흙이나 시멘트가 묻어 있다.

개나리 진달래 등 주변의 대형아파트와는 달리 이곳은 11평짜리 서민아파트.한 방에 앉아 무릎을 포갠 채 왁자지껄하는 동안 상이 나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와 꽁치구이 감자조림.넓은 대접에 수북히 담긴 밥과 함께.식사를 하는 동안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난 자녀들은 잠시 밖에 나갔다 온다.

순식간에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인천 천안 등지로 떠난다.

이들은 건설현장에 안전그물이나 발판을 설치하는 삼계산업 직원들.밑을 내려다보면 아찔한 고층빌딩 공사장에서 곡예하듯 일하는 사람을 위해 생명의 그물을 치는 사람들이다.

영동아파트는 박수열 삼계산업 사장이 살던 집.지금은 진달래아파트로 옮겼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네식구가 월세로 살았다.

부산에서 벌인 오퍼업이 실패하자 상경해 시작한 게 건설용 안전설비업이다.

부인은 5년이상 파출부 생활을 했다.

낮에 남의 집에서 일한 뒤 저녁이면 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온다.

새벽 4시부터 직원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해온 지 벌써 여러해 됐다.

삼계산업이 굴지의 건축용 안전설비업체로 자리잡은 데는 사장 부인의 따뜻한 정이 한몫했다.

서울 염창동 경인양행.연간 3천5백만달러의 염료를 수출하는 업체다.

이 회사의 창업주 김동길 회장은 틈나는 대로 연구소와 생산현장을 찾는다.

직원의 등을 두드리며 투박하지만 정감 넘치는 부산 사투리로 한마디 한다.

"별일 없제" 김 회장도 직원을 가족처럼 대하기는 마찬가지.한해 실적을 결산해 이익이 나면 일정 비율을 반드시 종업원에게 돌려준다.

외환위기로 대다수 기업이 어려움을 겪었던 98년에도 이 회사는 흑자를 냈다.

이듬해초 2백70%의 특별상여금을 줬다.

6백%의 정기보너스 외에 지급한 것.직원 3백40명에 창업한 지 29년이나 됐지만 아직 노조가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직원을 가족처럼 대하는 중소기업인이 늘고 있다.

고객이나 주주만족 못지않게 중요한게 종업원 만족이라는 생각에서다.

부산의 신발업체 학산의 이원목 사장도 비슷한 예.직원들이 따뜻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자신은 난방이 안돼 손이 곱을 정도로 추운 방에서 겨우내 점퍼를 입고 근무한다.

두부공장을 세워 직원들에게 무공해 먹거리를 제공하고 장학과 노후생활까지 책임지는 공동체 "비트로피아"건설을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임직원과 회사를 위해 땀흘려 일군 기업의 주식을 모두 넘겨주고 떠난 박용진 이디 사장은 종업원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 백미라 할 만하다.

평생 자가용 한대 없이 허름한 집에서 살며 내핍생활을 해왔지만 종업원에겐 후덕하게 대했던 그가 봄비를 맞으며 떠나던 날.몇몇 여직원이 끝내 울음을 터뜨린 것은 자신이 모시던 사장이 아닌,친정 아버지를 멀리 떠나보낸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김낙훈 기자 nhk@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