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정치는 무한의 이상에 대한 도전이란 신념으로 오직 한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조용히 그 길을 중단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케시타 노보루(76) 전 일본총리는 지난 1일 하시모토 전총리,아오키 관방장관,노나카 간사장등 자파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육성녹음 테이프를 통해 은퇴를 표명했다.

"정치역학의 천재" "금권정치의 대부" "2중권력자" "영원한 킹메이커"등 수많은 별명으로 일본정계의 대부역할을 해온 다케시타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다케시타 전총리는 중학교 임시교사로 출발,지방의원을 거쳐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고 다나카 전총리의 모금정치를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정치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85년2월 다케시타정권 창출을 위한 연구회인 소세이카이를 설립,보스인 다나카와 등을 졌다.

87년11월 다나카파로부터 독립,게이세이카이를 발족시켰다.

정치은인인 다나카 전총리를 밀어내고 최대파벌을 차지했다.

다케시타 전총리는 게이세이카이 결성 직후 "게이세이카이는 1백년간 계속된다.

내 뒤를 이어 하시모토,하타(총리 역임) 오자와(자유당 당수)순으로 총리가 되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는 선거대책과 국회운영을 통해 당내외에 정적을 만들지 않는 독특한 스타일로 입지를 다졌다.

이로인해 일부로부터 "정치이념이 없는 인물"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의 정치가도에 브레이크를 건 것은 뇌물제공 스캔들인 리크루트사건.

이 사건으로 금고지기 비서가 자살하고 자신도 1억5천만엔의 헌금을 제공받은데 대한 책임을 지고 89년4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다케시타파도 설립 5년을 못넘기고 분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퇴임후에도 조금도 줄지않았다.

우노,가이후,미야자와,무라야마,하시모토,오부치정권 수립에 막후조정을 했다.

자파인물을 간사장에 앉혀 선거와 국회대책을 사실상 결정했다.

인재발굴을 통해 하타,하시모토,오부치등을 정부의 얼굴로 키워냈다.

정국이 소란해질때면 늘 정치일정이 기록된 "다케시타 캘린더"가 국회주변에 나돌았다.

그래서 "2중권력" "다케시타 지배"등 비판이 잇따랐다.

다케시타가 총리에서 물러난지 10년11개월 내내 일본정계는 다케시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은퇴로 "10년이 지나도 다케시타상"으로 통해온 다케시타 시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됐다.

도쿄=김경식 특파원 kimks@ dc4. so-net. ne. 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