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투자 클리닉으로부터 자신의 주식 병을 진단받은 환자는 줄잡아 1만명쯤 된다.

부지런히 치료받고 새로운 투자 인생을 펼쳐 가는 분들을 보는 것이 낙이다.

적어도 그 동안 뭐가 잘못돼 왔었나를 절실히 깨우치는 그 모습들만 봐도 흐뭇하다.

침통하기만 하던 얼굴에 살며시 번지는 엷은 희열의 미소들이 우리를 지탱해 주는 힘이다.

약도 주사도 줄 수는 없지만 우리는 메디컬 닥터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수 년간의 연구와 실전,깔끔하게 정리된 논리,적절한 비유 및 사례,다양한 통계.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걸 바쳐서 목이 쉬고 땀에 젖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한다.

불행했던 그들의 주식 인생에 일대 전기를 마련해 줘야겠다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개원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환자가 아니라 우리 투자 전문의 한 사람이 질린 표정으로 회의중인 내 방에 불쑥 들어온 것이다.

아주 심각한 환자 한 분이 있는데 두 시간을 꼬박 해도 도저히 치료 불가라는 것이었다.

이대로 그냥 보내면 큰일 날 것 같은 예감이 드니까 한 번 만나 보라고 했다.

나는 회의를 급히 중단하고 그 분을 내 방으로 모셨다.

중년 부인이었다.

날만 새면 늘 보고 사는 게 어두운 얼굴들이지만 이 분의 경우는 달랐다.

침통의 단계는 이미 아니었다.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까칠한 피부,초점을 잃은 게슴츠레한 눈매,흐트러진 머리카락.

넋이 나갔다는 것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순진한 박 과장이 당황해 할만도 했다.

리스크관리니 저점매도니 하는 이론이 먹혀 들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슴을 쥐어뜯다,한숨을 쉬다,울다 말다,띄엄띄엄 말을 이어 가는 부인의 사정은 이러했다.

남편이 남기고 간 주식을 정리하러 간 것이 계기가 됐다.

돈만 갖고 오면 벌어 주겠다는 말에 정리는커녕 오히려 본격적으로 돈을 넣기 시작했다.

손실을 보자 더 갖다 붓고 또 붓고.

나중에는 빚까지 여러 차례 얻어 썼다.

결국 반 년 만에 원금의 95%를 날리고 평가로 3천만원 남짓 달랑 남은 처지에서 수소문 끝에 클리닉을 찾은 것이다.

죽 들어 보니 위험관리의 ABC도 모르는 증권사 직원들의 무지와 교만이 가파른 추락을 부채질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번다,기다리면 반등한다,너무 빠졌으니 팔면 안 된다,이제 물타기 해야 한다,빨리 만회하려면 신용을 써야 한다,돈이 눈에 보이니 미수를 찍어야 한다.

환자 중에서도 최상급 중환자들이 고객까지 진짜 환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먹여 주고자 하면 깡통 채우고,살려 주고자 하면 먹여 주게 된다는 진리를 냄새라도 맡았던들.

사모님,이러시다간 진짜 돌아가시겠습니다.

돈이야 없다가도 있는 거지만 생명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지 않습니까.

하루 빨리 마음의 안정을 찾으십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어머니가 강해지셔야지요.

그리고 이제 주식은 그만 하십시오.

이 돈으로 본전 찾으려다간 그나마 남은 돈도 다 잃습니다.

그리고 사모님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번 알아 보겠습니다.

클리닉을 하면서 처음으로 나는 고점매수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말을 한 마디도 안했다.

그 대신 내 주변에 도움을 청해 카운슬링을 주선해 드렸다.

막막해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누가 옆에 있다 생각하니 너무 고맙다며 사모님은 오늘도 목메인 소리로 통화를 한다.

몸이 아파 병원에서 전화를 받는다는 말씀을 들으니 증권쟁이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죄스럽다.

많은 투자자들과 증권사 직원들을 위해 사모님의 동의를 구하고 이 글을 쓴다.

돈보다 사람이다.

[ 김지민 한경머니 자문위원 현대증권투자클리닉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