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회의 준비를 한 후 호텔을 떠나기 전 진성호 방에서 만나기로 한 후 이현세는 방으로 돌아왔다.

서류를 챙기면서 이현세의 뇌리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끈질기게 머물러 있었다.

정치 자금을 이토록 심하게 훑어내는 상황에서,환율이 묶여 국제경쟁력을 이미 잃은 상태에서,그리고 노동자의 권익이 도를 넘은 상황에서 어떻게 기업이 생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진성호의 판단이 옳을지 몰랐다.

기업이 살아남으려면,집권 가능성이 있는 대권 후보측에 정치자금을 무리해서라도 제때에 대주어 집권 후 어떤 특혜에 기대라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레저산업이라는 미명 아래 기업이 부동산이라도 사놓아 값이라도 오르기를 기대해야지 다른 희망이 없는 듯했다.

이현세는 잠시 과거를 되새겨보았다.

6년 전 입사하여 회사의 실상을 안 후부터 여러 번 진성호 회장에게 사의를 표할 기회를 찾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아 번번이 실패했다.

진성호 회장이 회사경영에 바치는 젊음의 정열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나이에 때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식의 무모함을 드러내기도 하나,한 가지 분명한 것은 회사의 장래를 자신의 생명과 동일시한다는 것이었다.

진성호가 보이는 이기심 없는 젊음의 정열에 회사를 떠나겠다는 그의 의지가 표현의 기회를 잃었다.

더구나 자신이 떠나고나면 황무석 부사장 같은 자가 회사의 경영을 좌지우지할 것은 뻔한 일이고,그렇게 되면 짧은 시간내에 회사의 조직이 균열되어 존립 자체가 위태로우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했다.

때로는 황무석 같은 자가 득세를 하는 세상인지라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며 모든 정을 훌훌 털고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를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왕 조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조직이 허물어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어떻게 하든 일할 수 있을 때까진 최선을 다해볼 작정이었다.

설명회를 위한 자료 준비를 마친 이현세가 진성호의 호텔방에 들어섰을 때 진성호는 발코니에 서 있었다.

진성호가 손짓으로 오라고 해 이현세도 발코니로 나갔다.

진성호가 도시 한 곳을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맨해튼의 마천루가 한눈에 들어왔고 그 가운데 월 스트리트의 빌딩숲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진성호는 그곳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심호흡을 했다.

"저기 보세요.

저기 있는 월 스트리트의 빌딩숲이 보이지요? 저곳이 거대한 힘을 가진 제국의 성채처럼 보이지 않아요?"

진성호가 이현세를 향해 뒤돌아보며 흡족한 미소 속에 말했다.

그리고 월 스트리트 쪽으로 시선을 다시 주며 말을 이어갔다.

"제국의 식민지에 군대를 보내는 대신 자본을 보내고..엄숙한 외교관 대신에 약삭빠른 투자자를 파견하고.. 식민지로부터 원자재를 실어오는 대신 주식을 손아귀에 넣고.. 아편으로 식민지 국민을 무력화시키는 대신 저질 대중문화로 식민지 국민을 타락시키는 제국.."

진성호가 이현세를 보았다.

"그것이 21세기 식민정책이지요.

제국의 본산은 월 스트리트고요.."

"그래요. 그것이 21세기 식민정책이지만 우리는 결코 식민지 국민이 될 수 없어요.

그러니 죽기살기로 일해 정복되지 말아야지요"

진성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