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꼈던 머리끈이 있었다.

낡은 거였지만 정든 거였다.

단발머리인 나는 손목에 머리끈을 감고 다니다가 일하는데 방해된다 싶으면 그것으로 머리를 질끈 묶어버렸다.

그 사람이 내게 주었던 그 머리끈은 그 사람과 헤어진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비밀서랍처럼 남아 그 시절을 증거하고 있었다.

물건이 무슨 죄가 있겠니 하는 마음으로 남겨두었던 거였지만 어쩌면 그 시절을 잊고 싶지 않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걸어오는 그 시절이 견딜만 했을 때 꺼내 쓰기 시작한 머리끈은 정이 붙어 그 때 그 시절을 문득문득 상기시켰지만 나쁘지 않았다.

추억이 깃든 물건,정이 든 물건은 함부로 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느낌이 있는 그 무엇이므로.

간편한 일회용에 익숙해지면 사람이 깨끗해지는 게 아니라 마음놓을 자리가 없어진다고 캔음료도 들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말씀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니까 외국엘 가도 박물관부터 찾게 된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사람들이 쓰던 물건들은 아스라한 역사만큼이나 신비하고 손떼가 묻은 만큼이나 정겹다.

물건 하나 하나를 보면서 그 때 그 사람은 이렇게 살았을 거야,저렇게 살았을 거야,상상해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여유롭다.

느낌이 있는 물건은 사람처럼 자리를 탄다고 생각한다.

어울리는 자리가 있고 어색한 자리가 있다.

유네스코협약에 따르면 문화재는 원래 나라로 돌려주게 되어 있다.

그 물건이 태어나서 살았던 자리,물건이 물건이 아니라 문화가 되었던 자리가 그 물건이 돌아가야 할 가장 어울리는 자리란 뜻이 아닐까.

나는 아직도 제 자리를 찾아오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떠돌고 있는 우리 문화재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복잡해진다.

그 중의 하나가 프랑스에 가있는 규장각 도서다.

주책 맞게 기억력만 좋아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알스톰사가 고속전철 사업자로 선정되기를 지원했던 프랑스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를.

우리 대통령을 만난 프랑스 대통령은 우리의 규장각 도서를 반환하겠다는 의욕까지 보이면서 알스톰을 지원했었다.

그런데 도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고 고속전철 사업을 둘러싼 부패의 냄새는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우리가 바보인가,프랑스가 지능적인가.

아직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 봐도 확실한 게 있다.

알스톰사는 고속전철 사업을 따내기 위해 불법적인 로비를 했다.

그리고 그 불법적인 로비는 부패의 증거였다.

화가 나는 건 아시아를 언제나 부패와 연결시켜 무시했던 서구인들이 보다 교묘하고 보다 노골적인 부패스캔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며칠 전에도 한 스캔들이 터졌다.

프랑스 방위 산업체가 대만에 프리깃 함 6척을 팔면서 5억달러의 커미션을 대만 집권당과 중국 공산당에 제공했다고 한다.

대만에 무기를 팔면서 왜 중국공산당까지 챙겼을까.

대만의 무기 구입에 분노한 중국정부 지도자들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르 피가로지에 따르면 이 커미션 제공이 재경부 장관의 승인 아래 이뤄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부패가 아니라 애국인가.

자,입장 바꿔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 업체가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불법적인 로비를 했다면?

그리고 불법적인 로비를 당연시한 그 부패불감증 업체를 우리 정부가 정부차원에서 지원하고 밀었다면?

그 후 사업이 50% 정도 진행된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가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면?

그렇다면 프랑스는 우리에 대해 어떻게 했을까.

그냥 유야무야 넘겼을까,손해배상을 청구했을까.

나는 생각한다.

프랑스 정부는 이번에 드러난 고속전철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에 협조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부패업체의 물건을 사도록 종용한 것에 대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나아가서 우리 국민이 입은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손해에 대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우리는 분명히 프랑스에 대해 우리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왜 지켜야 할 것을 놓고 치열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너무 착하고 우리의 지도자는 너무 답답한 게 아닌지.

여자든 남자든 나는 뚝심이 있는 사람,싸울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싸워야 할 때 싸울 줄 아는 사람이 무엇을 아껴야 할 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이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진짜 부드러운 사람이다.

언제 싸워야 하는 지 모르는 사람들,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착하지만 무능한 사람들이 지도자일 때는 착하다는 것도 답답하다.

잘못하면 무능을 정당화하는 구조가 되니까.

규장각 도서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일본으로 건너간 3만여점의 문화재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 현실이 우리의 외교력인지도 모르겠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의 권리는 보호하지 않는다고 했던 예링의 말이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진실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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