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최형식은 영등포역 근처 허름한 지하다방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중국 연변에서 온,어느 가정의 보모로 일하는 조선족 김인순을 만나고 나오는 길이었다.

김인순은 자신의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3개월 전 자신을 찾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장본인으로 아버지가 북한에 살아 계신다는 소식을 전한 바로 그 여인이었다.

벌써 네번째의 만남으로 아버지의 여권수속이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궁금해서 만난 것이었다.

최형식은 여의도 방면으로 차를 몰면서 방금전 김인순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아버지가 자신이 보낸 편지를 전해받고 굉장히 기뻐하셨다는 말과 아버지의 여권수속이 2,3개월 더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해인 1950년 인민군의 퇴각과 함께 북으로 간 아버지를 머지않아 중국에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들떴다.

북한에 있는 김인순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친구로 김인순이 한국에 오게 됨으로써 아버지와 연락이 닿게 된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

김인순과 헤어지기 전 나눈 대화가 몹시 흥미롭게 기억에 남았다.

"이제 남한에 정이 붙었지요?"

그가 물은 질문이었다.

"아직도 남조선은 잘사는 시집 같고 북조선은 못사는 친정집 같아요"

김인순의 주저함 없는 대답이었다.

얼마 후 최형식은 여의도 방송국 앞 보도 옆에 정차해 있는 차의 운전석에 앉아 방송국 입구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대해실업 진성호와 현재 별거중인 처 이정숙이 나올 시간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아침에 이정숙이 아버지 집인 이인환 교수집을 나와서부터 귀가할 때까지 미행해왔다.

이정숙의 일과에 뚜렷한 패턴이 보였다.

직업이 교수라는 여자가 주중인데도 학교에 있는 시간은 한두 시간밖에 안 되고,낮에는 고급 백화점에서 쇼핑을 한다든지 헬스센터나 뷰티숍에서 소일하고,밤이 되면 일류 호텔의 패션 쇼에 간다든지 외식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황무석이 꼬리를 잡으라고 부탁한 텔레비전 토크쇼 사회자인 정동현과 이정숙이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가 될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번 이상한 일이 일어나긴 했다.

어제 밤 꽤 늦은 시간에 이정숙이 모는 차가 홍은동에 있는 스위스그랜드 호텔의 주차장에 들어갔다.

그곳 주차장에서 이정숙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핸드폰을 받는 이정숙의 모습이 차 뒤창으로 보였다.

곧 이정숙이 차에서 내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최형식이 뒤따라 들어갔으나 이정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텔 내의 식당을 둘러보았으나 그곳에도 없었다.

패션 쇼가 있나 해 알아보았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주차장으로 가 차안에서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쯤 후 이정숙이 차로 왔고 곧장 귀가했었던 것이다.

운전석에 앉아 이정숙을 기다리던 최형식은 문득 외가 쪽 아저씨 뻘인 황무석의 부탁이긴 하지만 재벌 여인네의 불륜관계를 캐려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얼른 생각을 바꿨다.

자신의 현재 취직처를 마련해준 고마움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18년 전 어느 날 일어났던 일이 순간 떠올랐고 그때 황무석의 도움이 상기되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