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넨 타임지 사장 서울방문]

전경련은 1975년 3월 매크러컨 교수를 다시 한국에 초청했다.

"정책채널"설립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도 대통령 선거 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했다.

카터가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

주한 미군 철수 문제가 제기됐다.

"한국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문제에 우리 의사를 반영시킬 길은 없을까"

매크러컨 교수에게 솔직히 물었다.

"전경련은 공화 민주 양당 중심으로 20명 내외의 인사들과 연계를 맺도록 하시오.그러면 어느 당이 집권하든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오.물론 20여명과 평상시에도 성실한 관계 유지에 힘써야 하겠지만..."

20명 인선을 교수와 리넨 사장에게 위임하기로 한다.

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가 당선된다.

주한 미군 철수도 선거 강령에 들어있었다.

한국 전체가 긴장했다.

필자는 나름대로 타임이나 뉴스위크지 등에 기고하는 방식으로 철군 반대 이유를 표시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약소민국의 무력함을 , 특히 미국과의 채널 미비를 뼈저리게 느꼈다.

더욱이 박정희 정부와 인권 문제를 내세우는 카터 정부와의 사이는 나쁠 대로 나빠졌다.

이 무렵 매크러컨 교수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중공을 방문하는 타임지 리넨 사장에게 귀국길에 서울에 들러 필자와 만나도록 권고했다는 것이다.

당시 11년간 회장직에 계시던 김용완 회장이 퇴임하고 정주영 회장이 새로 취임했다.

정 회장과 지체없이 리넨 사장 방한 문제를 협의한다.

"한.미정책채널설치"문제에 이의가 있을 리 없다.

정 회장은 적극성을 보였다.

드디어 77년 6월 리넨 사장,정 회장,필자가 오찬을 함께 했다.

"한.미관계에 대한 전경련 구상은 매크러컨 교수로부터 소상히 듣고 있습니다. 본인도 이 구상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인에게 20명 인선 등을 위임해 주시면 교수와 협의해서 곧 추진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즉석에서 선선히 응해 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리넨 사장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이 사업 추진 예상경비,연간 20만달러 마련을 언약했다.

리넨 사장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으니 한시름 놓았다.

매크러컨 교수,리넨 사장 두분이 추진하면 꼭 성사시킬 것으로 믿었다.

한분은 학계의 거물이요,경제자문협의회 의장까지 지낸 분이다.

리넨 사장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주간지의 사장일 뿐만 아니라 원만한 인품과 높은 식견으로 미국 조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가 갖고 있는 인맥 또한 대단하다는 것이다.

리넨 사장은 귀국 후 한달도 채 못돼 인선에 착수했고 호응이 좋다는 서신을 보내 왔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서 매크러컨 교수도 이 일로 워싱턴으로 간다고 연락해 왔다.

가을에 접어들어 매크러컨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상시 맑은 목소리가 그날따라 힘없이 가라앉았다.

"너무 놀라지 마시오.타임지의 리넨 사장이 폐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오.방사선 치료를 곧 받을 예정이라오...그러니 부득불 우리 구상(한.미정책협의회)도 일단 유보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소.서로 리넨 사장의 쾌유를 기도합시다"

무슨 날벼락인가.

좋은 일에 마가 낀다더니,이런 마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당시 실망은 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다.

사실 81년 필자는 전경련을 그만 두고 한국기술개발 사장 재임시에도 이 문제를 추진했었다.

당시 이스라엘 장군 출신이자 과학기술처장을 지낸 야고브( Yakov ) 박사가 IBRD 파견 고문으로 와 있었다.

필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관계 비결을 물었다.

그것은 바로 미.이스라엘 정책협력기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문제는 필요하면 이 기구를 통해 24시간 내에 미 대통령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82년 필자가 뉴욕 방문시 야고브 박사는 자기 집에 미.이스라엘 협력위원회 미국측 위원장인 제록스의 선임 부회장을 초청,소개해줬다.

그 비법을 전수받으라는 것이었다.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