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고대 이집트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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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역사가들은 파라오시대 제1왕조의 시작을 BC3200년으로 잡고 있다.
파라오시대는 제30왕조가 끝나는 BC341년에 막을 내린다.
2천8백59년동안 이어져온 셈이다.
하지만 이 찬란했던 이집트문화의 시기는 인류역사속에서 잊혀져 버리는 비운을 맞는다.
BC47년 시저의 공격으로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의 70만 장서가 불타버리고 AD391년 로마가 신전들을 폐쇄한 후부터는 주민들 사이에서 쓰이던 상형문자마저 사라져 5세기 중반에는 고대 이집트 문헌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대 이집트 역사도 기억 저편으로 함께 묻혀 버렸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몇몇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이 여행했던 고대 이집트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남겼다.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는 BC450년께 이집트를 여행했다.
그는 이집트인의 일상생활 종교생활 풍속들을 저서 "역사"의 제2장에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부유층의 연회에서 술자리가 시작되기전 실물과 똑같이 조각한 사람을 관에 넣어 손님들에게 보이면서 "당신도 죽으면 이런 모습이 될 것이니 마음껏 술을 마시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다.
또 여자는 소변을 서서 보고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서 본다는 것이라든지 노인을 길에서 만나면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풍속등도 빼놓지 않았다.
미라를 만드는 방법도 계층별로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밖에도 나일강 하구 델타지역을 비롯 전역에 산재한 헤라클레스신전,풍요의 신 이시스를 모신 신탁소등 그리스보다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을 뽐내는 건조물에 대해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에게 헤로도투스의 기록은 유적이나 문헌의 해석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고대인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귀중한 단서다.
지난주말 알렉산드리아 인근 해저에서 발굴된 2천5백년전의 고대도시 헤라크레이온과 메누우티프유적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이나 전설에는 등장해도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것이었다.
기록도 명확치 않고 유적도 심하게 훼손된 우리 풍납토성의 경우를 생각하면 부럽기만 하다.
파라오시대는 제30왕조가 끝나는 BC341년에 막을 내린다.
2천8백59년동안 이어져온 셈이다.
하지만 이 찬란했던 이집트문화의 시기는 인류역사속에서 잊혀져 버리는 비운을 맞는다.
BC47년 시저의 공격으로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의 70만 장서가 불타버리고 AD391년 로마가 신전들을 폐쇄한 후부터는 주민들 사이에서 쓰이던 상형문자마저 사라져 5세기 중반에는 고대 이집트 문헌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대 이집트 역사도 기억 저편으로 함께 묻혀 버렸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몇몇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이 여행했던 고대 이집트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남겼다.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는 BC450년께 이집트를 여행했다.
그는 이집트인의 일상생활 종교생활 풍속들을 저서 "역사"의 제2장에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부유층의 연회에서 술자리가 시작되기전 실물과 똑같이 조각한 사람을 관에 넣어 손님들에게 보이면서 "당신도 죽으면 이런 모습이 될 것이니 마음껏 술을 마시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다.
또 여자는 소변을 서서 보고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서 본다는 것이라든지 노인을 길에서 만나면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풍속등도 빼놓지 않았다.
미라를 만드는 방법도 계층별로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밖에도 나일강 하구 델타지역을 비롯 전역에 산재한 헤라클레스신전,풍요의 신 이시스를 모신 신탁소등 그리스보다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을 뽐내는 건조물에 대해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에게 헤로도투스의 기록은 유적이나 문헌의 해석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고대인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귀중한 단서다.
지난주말 알렉산드리아 인근 해저에서 발굴된 2천5백년전의 고대도시 헤라크레이온과 메누우티프유적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이나 전설에는 등장해도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것이었다.
기록도 명확치 않고 유적도 심하게 훼손된 우리 풍납토성의 경우를 생각하면 부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