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성직자 한사람이 시골 여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관 주인은 매우 슬퍼했다.

아름다운 외동딸이 죽었기 때문이다.

주인 부부는 그날 밤 이 남자에게 딸의 시신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딸이 굉장한 미인었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호기심에 못이겨 수의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자제력을 잃고 서약마저 잊어버린 채 그녀를 껴안고 말았다.

문제는 다음날 무덤에 도착한 뒤 발생했다.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되살아났다.

현대의학으로 보면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곤란해진 부모는 딸이 아이를 낳자 곧 수도원에 보내버렸다.

지금 보면 별스럽지도 않은 얘기지만 18세기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 때는 죽은 듯이 보이는 것과 실제로 죽은 것의 구별이 의학적으로 확실하지 않았다.

더욱이 여성의 성적 흥분과 임신의 상관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

오르가즘 없이는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임신 과정이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다.

의학계는 계몽주의 시대 후반에야 "여성의 오르가즘이 임신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내 "쾌락 없이는 어떤 생명체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고대의 가르침이 뿌리째 뽑힌 것이다.

"난소"라는 단어도 19세기에야 생겼다.

여성을 대표하는 명사가 2천년동안 이름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긴 일부일처 결혼제도가 정착된 것도 18세기였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남녀의 성기에 관한 해부학적 지식 또한 그랬다.

17세기 후반까지 "여성의 자궁은 남성의 음낭과 음경을 안으로 뒤집은 것일 뿐이며 안과 밖의 차이를 제외할 때 자궁과 남근은 모든 점에서 일치한다"는 주장이 풍미했다.

이는 당연히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삼는 의식구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람(man)과 남성(man)은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8일 국내에 번역출간되는 "섹스의 역사(원제:Making Sex)"(토머스 월터 라커 저,이현정 옮김,황금가지,1만8천원)는 이같은 성의 명암을 깊이있게 파헤친 역작이다.

섹스를 통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역사와 사회적 이데올리기를 해부한 것이다.

저자는 버클리대 역사학 교수.

그는 인간의 몸과 섹스에 대한 인식이 여러 세기동안 얼마나 급격하게 변해왔는가를 실증적으로 규명했다.

먼저 문학 미술 음악 등 수많은 텍스트와 의생물학적 자료들을 동원해 생물학적 "섹스(sex)"와 사회학적 "젠더(gender)"의 관계에 렌즈를 들이댄다.

이를 통해 생물학적 "섹스"조차도 자연현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이해관계에 따라 재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과서마다 난자를 향해 헤엄쳐 가는 정자들의 그림이 실려 있지만 이것도 사실은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것이다.

따져보면 남성의 능동성과 여성의 수동성이라는 문화적 가정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정자는 난자에 비해 크기가 작고 약해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는 인해전술을 써야 한다.

그런데도 그 활동적인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남성중심 사고의 "굴레"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철학적 관점에서 본 성과 몸의 사회사다.

무턱대고 야한 책이라고 덤볐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의외로 무겁고 진지하다.

분량도 4백80쪽에 달한다.

때로는 딱딱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불과 2백년 사이에 이뤄진 인식의 대전환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여성의 "젠더"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과학이나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문화의 산물이라는 게 저자의 지론이다.

<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 >

---------------------------------------------------------------

[ ''性사회학'' 관련서적 ]

<>섹스란 무엇인가(린 마굴리스 외,지호)
<>몸의 현상학(한국현상학회,철학과현실사)
<>섹스 포르노 에로티시즘-쾌락의 악몽을 넘어서(김수기 외,현실문화연구)
<>여성 몸 성(장필화,또하나의문화)
<>몸의 사회학(크리스 쉴링,나남)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앤소니 기든스,새물결)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이거룡,한길사)
<>몸이라는 화두(고영섭,연기사)
<>섹스의 영혼(토마스 무어,생각의나무)
<>섹스 사이언스-성의 분화에서 성행동까지(이시하마 아츠미,전파과학사)
<>세계풍속사(파울 프리샤우어,까치)
<>섹스 마인드(김진만,황금가지)
<>섹스 이전에 성이 있었다(윤천근,예문서원)
<>섹스와 편견(번벌로 외,정신세계사)
<>섹스에 관한 일곱가지 거짓말(앨리스 프라일링,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몸과 미술(한림미술관,이화여대출판부)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크리스티안 노스럽,한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