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에크 교수의 업적 ]

하이에크를 LSE 교수로 초빙한 것은 경제학 과장이었던 라이오넬 로빈슨(1898~1984)이었다.

1958~1959년에 필자도 이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학생들은 그의 풍모와 권위에 압도당한다.

마치 몇년 전 TV연속극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에 나오는 교수 "킹스필드"박사와 같은 모습이다.

육중한 몸매에 음성 또한 중후하다.

이 교수가 1년 한 두학기 강의를 마치면 그 강의 내용은 곧바로 책으로 출판되곤 했다.

강의 내용은 새로운 학설이거나 경제학에서 꼭 읽어야 할 서적으로 남는다.

당시 필자는 이분의 강의내용이 책으로 출판되는 것을 보곤 "대학 교수가 되려면 로빈슨 교수 정도는 돼야 한다"고 느꼈다.

후일 귀국해 대학 교수로 권유받았을 때 로빈슨 교수가 떠올라 필자는 대학 교수감이 못된다고 주저하게 된다.

로빈슨 교수는 독일어에도 능통,오스트리아 학파 출신인 하이에크 박사에 호감을 갖고 LSE 에 초빙했다.

하이에크의 런던 첫 강의는 당시 영국 경제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던 "과소비 비판"이었다.

이는 바로 케인즈( Keynes )와 생애에 걸친 이론적 논쟁의 시작이 된다.

1931년 1월 LSE 교수로 부임한 하이에크를 로빈슨 교수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나는 아직도 문앞에 서 있던 키 크고 당당한 인상,자신을 하이에크라고 나직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소개하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하이에크 교수가 LSE 교단에 설 무렵, LSE 는 정치학은 물론 경제학에서도 세계 3대 명문대학으로 명성을 떨친다.

당시 시카고 고교생이었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사무엘슨 교수는 회고담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시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생각할 때 우선 LSE나 케임브리지를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하버드는 2류에 속했으나 장학금을 준다기에 하버드를 택했다"(일경저널,1998).

히틀러가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런던 공습을 강화한다.

LSE 도 폭격을 피해 1939년 케임브리지에 피란한다.

하이에크는 학문에서는 호적수요,개인적으로 친구인 케인즈의 도움으로 King''s College 에 연구실을 얻는다.

이때 하이에크 교수는 큰 위기의식에 사로잡힌다.

동료 영국 경제학자들은 전쟁 수행에 동원되고 유럽의 지적 분위기는 사회주의,전체주의에 휩싸였다.

이대로 방치하면 " 서구문명의 자랑인 자유주의는 뿌리째 흔들리겠다"며 하이에크는 크게 고민한다.

순수이론 경제학자가 취할 길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대중계몽용 책자 "노예로 길"을 집필한다.

이 책이 출판되자 마자 하이에크는 영국에서 찬반의 소용돌이에,미국에선 찬사의 불꽃에 휩싸인다.

덕분에 하이에크의 명성은 전세계에 알려졌으나 동료들 중에는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유럽 지식사회는 공산주의는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의 전성기였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의 계획과 집단주의적 경제운영은 필경 나치나 소련 공산주의 사회로 떨어질 것이라는 경고를 계속했다.

그의 저서 "노예의 길"은 하이에크 교수의 끈질긴 경고의 집약이다.

이는 후일 하이에크의 노벨상 수상에도 지장을 준다.

아직도 사회주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지식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1974년 자신의 오랜 지적 적수인 군나르 뮈르달( Gunnar Myrdal )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는다.

사회주의 성향을 띤 뮈르달은 자유경제론자인 하이에크와 노벨상 공동 수상자로 선택된 것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다.

뮈르달은 수상식때 하이에크와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에 대한 하이에크 소감은 다음과 같다.

"노벨상은 나에게도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난 노벨경제학상을 좋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물론 내가 그 상을 받기 전까지만.명성을 얻으면 좋은 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갑자기 수상자의 얘기를 경청하게 된다는 점이다"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