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 서울대 미대 부학장 / 화가 >


내가 사는 아파트 뒤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체육센터의 헬스클럽이 있다.

여기 등록을 하고 나간지 얼마 안되었다.

시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보니 값이 저렴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 사람들로 붐빈다.

그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운동기구는 런닝머신이다.

런닝머신이 몇개 있는데 늘 사람이 기다려야 한다.

숫제 이 기계 옆에 칠판이 있어 거기 순번을 적고 기다리게 되어 있다.

사람이 많다 보니 개인 이용시간을 10분으로 제한했다가 요새 15분으로 늘렸다.

이 15분을 뛰기 위해 어떨 땐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시간을 잘 안 지킨다는 점이다.

스무명쯤의 대기자가 있는데도 30분 뛰는 것은 예사이다.

한 여자는 50분,한 남자는 1시간10분 뛰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지나치게 긴 시간을 혼자서 쓸 때에는 주의를 주는 나이든 남자 한 분이 있었다.

물론 그도 그 곳을 이용하는 시민의 한 사람이지만 그가 가끔 "입바른 소리"를 해주는 덕에 컨트롤이 좀 되어지곤 한다.

어느 날 내 곁에서 뛰고 있는 아주머니가 40여분을 독차지하고 뛰고 있을 때 그 남자가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나는 "옳다구나" 싶었다.

아주머니 쌤통이다 싶었다.

그때 아주머니는 숨이 차올라 뛰기를 그만두고 기계를 멈추려는 때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좀 더 하지 그래,당신"

여자가 숨이 차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남자는 한사코 좀 더 하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부부였다.

얼마 전 들은 이야기다.

붐비는 전철에서 아주머니 한사람이 두사람 앉을 정도의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가까이엔 서있는 노인도 있었고,아기를 업은 아주머니도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양발을 떠억하니 벌리고 움쩍도 않더라는 것이다.

다음 역에서 한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차에 올랐다.

그러자 차에 오른 남자 하나를 향해 꼼짝 않고 있던 아주머니가 외치더라는 것이다.

"여보,이리 와요. 여기 자리 잡아놨어요"

한 때 세검정 인왕산아래 작은 집에 산 적이 있었다.

부암동 322의 20번지가 내가 옛날 살던 집이었다.

공기도 맑고 아름다운 동네였지만 흠이라면 너무 고지대라서 수도 사정이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바위산아래 쫄쫄거리고 흐르는 약수터가 하나 있어서 동네 사람들은 새벽부터 그 약수터 아래로 모여들곤 했다.

특히 가문 여름철이면 찔끔찔끔 내리는 약수는 생명수와 같이 귀중한 것이었다.

한시간 기다려 작은 물통에 하나 받아 가면 운이 좋았을 정도로 약수터는 늘 붐볐다.

주민들은 보통 작은 물통을 갖고 간다.

그런데 가끔 한번씩 물지게를 진 아주머니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커다란 물 통 두개에 가득 물을 받기전에는 결코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항의를 해보지만 꿈쩍도 않는다.

때문에 물 받으러 오던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있으면 아예 되돌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아주머니는 그 곳에서 소문나게 억센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 아주머니의 고집과 억지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 여자는 "시집 간 딸들에게랑 물을 보내려면 이것도 얼마 못 간다"고 미리 너스레를 떨곤 했다.

정말이지 아주머니의 그 드센 어거지에 대항할 사람도,또 두꺼운 얼굴을 마주할 만한 배포있는 사람이 그 곳에는 없었다.

그 일을 내가 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아주머니에게 대들었다.

아주머니가 하얗게 거품을 물고 덤볐다.

그래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동네가 떠들석했던 그 싸움 후에 아주머니는 다시는 물통을 들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 소문을 그 곳을 떠나오고 나서야 듣게 됐다.

우리 사회 여러 문제 중의 하나가 이 막무가내인 "가족 이기주의"다.

어떤 예리한 창으로도 이 철벽같은 가족 이기주의를 뚫을 수가 없다.

이 혐오스러울 만치 빗나간 부부간 가족간 이기주의가 완화되어질 때에 진정한 문화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Kimbyu@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