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일본 미국 및 태평양지역국들과의 협력기구 설립에 대해 썼다.

앞으로는 유럽 여러 나라들과의 협력 문제에 대해 쓰려고 한다.

대외협력은 이 나라,이 민족 생존 번영의 키워드다.

19세기 말 일본에 강점된 주된 이유는 한민족이 외부세계의 움직임을 너무나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이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이 민족이 어떻게 하면 외국으로부터 수모를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답은 대외정보의 창을 많이 만드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선진외국의 정보와 경험을 자유로이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이 흡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필자는 1960년초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일.유럽 여러 나라들과 20여개의 각종 국제협력기구를 창설했다.

이들중 많은 협력기구가 오늘날에도 활동한다.

이들은 전경련( FKI )대외활동의 기본 전략과 틀을 이루고 있다.

국제협력기구들을 설립하면서 필자는 "한반도가 지중해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종종 해본다.

그랬으면 적어도 세계흐름에 뒤지지 않고 또 일본 강점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유럽 협력기구의 타진은 영국에서부터 시작했다.

1962년 11월 영국 방문 길에 영국공업연합회와 접촉했다.

그 후 전경련은 기회있을 때마다 유럽 각국과의 경협증진에 주의를 기울였다.

1973년 대한항공( KAL )의 에어버스 도입계획은 유럽과의 경협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 때까지 KAL 은 주로 미국의 보잉사에서 여객기를 도입했다.

그러나 근거리 중형여객기는 가격이나 연료 소비면에서 에어버스가 훨씬 유리했다.

그래서 KAL 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가 공동 생산하는 에어버스를 3대나 도입했다.

전경련도 이 기회를 놓칠세라 프랑스경제인연합회에 경협위 설치를 제안했다.

전경련은 국내 "한.불위원회"를 73년 12월에 구성했다.

위원장에 조중훈 KAL 회장,한 불 문화교류의 주도자인 설원식대한방직 사장(부위원장) 등 58명으로 했다.

프랑스측도 같은 취지의 기구를 동시에 발족했다.

1974년 3월 24일 드디어 파리에서 "제1차 한.불 경협위"가 열렸다.

"동방 은둔의 나라-한국"이 드디어 유럽 문명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긍지높은 프랑스 경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남덕우 부총리,신병현 상공부 장관 등이 IECOK (대한국제차관단) 회의관계로 함께 갔다.

밤에 파리로 향하는 기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필자 뒷좌석에는 남 부총리,신 장관,그리고 필자의 옆에는 조 회장이 앉았다.

필자는 도쿄에서 조 회장을 위해 보내준 책들을 읽었다.

마르크스의 전기도 끼어 있었다.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자본론을 집필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가정부를 건드려 딸을 낳았다.

사생아였다.

세월은 흘러 그 여자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기 호적에 입적시킬 용기(?)가 없어 쩔쩔맸다.

생애의 친구이자 생활 후원자인 엥겔스가 자신의 호적에 대신 올렸다.

"세계 무산계급혁명"의 지도자인 마르크스가 자신의 불륜아 문제로 허둥대는 광경이 머리에 떠올라 끝내 웃어버렸다.

이 순간을 뒷좌석에 있던 두 장관이 보고는 "혼자만 웃지말고 같이 보자"고 졸라대던 기억이 어제 같다.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