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109) 韓-佛 합동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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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韓-佛 합동회의 ]
1973년 12월은 한.프랑스 경협위 제1차 합동회의준비로 시간이 빨리 갔다.
출발을 며칠 앞두고 조중훈 KAL 회장은 "상의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고 했다.
필자는 KAL 회장실로 갔다.
조 회장은 한.프랑스 경협위 한국측 위원장이 된 후 더욱 희색과 활기에 차보였다.
몇마디 이야기를 나눌 때 옆문으로 직원이 들어왔다.
"오늘 김 부회장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라며 잠시 멈추고 방금 들어온 직원을 다시 봤다.
"이 사람은 최근 KAL에서 채용한 정하용 박사인데,프랑스어를 잘 한다오.이번 한.프랑스 회의에서 정 박사에게 통역을 부탁할까 해서"
필자는 "왜 KAL의 인사문제를 나에게 상의하나"하며 순간 의아하게 생각했다.
조 회장은 "정 박사는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으나,지난 70년 크리스마스대 사면됐소.그런데 아직 해외 여행이 자유스럽지 못하오"라고 말했다.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 발표에 의하면 "동백림 사건"은 북한이 독일.프랑스 등에 있던 우리 유학생을 조직적으로 포섭한데서 비롯됐다고 했다.
교포 음악가 윤이상씨를 비롯해 유학생 관련자가 1백94명이나 되고,이중 정하룡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정하룡군은 전경련 추천으로 파리에 동행하게 됐다.
전경련은 한.프랑스 경제협력 합동회의에 대해 각별한 열성과 주의를 기울였다.
이 회의는 유럽에서 열리는 한국과의 첫번째 민간협력회의였다.
한.프랑스 합동회의 귀추에 따라 인접한 나라들,즉 영국.독일 등은 우리와의 경협수위를 결정하려 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전경련이 의도했던 것은 <>프랑스를 통한 유럽시장 개척,<>프랑스의 항공기제작,정밀기계,디자인산업 등과의 제휴 <>아프리카 등 불어권 지역에서의 건설.엔지니어링 공동진출 등이었다.
이밖에 외자유치 창구로서의 합작금융기구 설립 구상과 더불어 합작투자 촉진에도 역점을 뒀다.
이러한 한.프랑스 경제합동회의의 "의제,절차,공동커뮤니케" 등은 그 후 유럽 여러 나라들과 설립한 10여개 경제협력위원회의 원형이 됐다.
이에 따라 1974년 3월24~25일 파리에서 제1차 한.프랑스 합동회의,이어 1975년 3월25일 역시 파리에서 제2차 회의,그리고 1976년 9월15일 서울에서 제3차 합동회의가 개최됐다.
불어권 지역 공동진출을 위한 "건설분과 특별위원회"신설,프랑스정부 초청 장학생의 전경련 선발,그리고 경영연수생 30명 파견 등을 추진키로 했다.
양국간 인사교류도 급속히 늘어났다.
75년에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동생인 올리비에 지스카르 데스텡이 구주경제센터 회장자격으로 방한했다.
이어 레이몽 바르 통산장관,프랑스 행정연구원장도 서울에 와 문화교류를 활발하게 진척시켰다.
파리나 유럽에는 구주공동체 등 국제협력기구가 여러개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대한국경제협의체(IECOK)회의 등 한국정부 대표가 참가하는 국제회의 개최시기에 민간합동회의도 열기로 했다.
민간 경제합동회의에 한.프랑스 양국정부 장관 등 고위관계자들이 함께 참석,양국협력을 촉진시키는데 힘을 실어줬다.
이는 오늘날 대통령 국빈 방문때 경제인 동행이라는 관례(?)를 낳게 했다.
남덕우,신현확 부총리 등은 관.민합동사절단 단장으로 많은 수고와 성과를 함께 하신 분들이다.
<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
1973년 12월은 한.프랑스 경협위 제1차 합동회의준비로 시간이 빨리 갔다.
출발을 며칠 앞두고 조중훈 KAL 회장은 "상의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고 했다.
필자는 KAL 회장실로 갔다.
조 회장은 한.프랑스 경협위 한국측 위원장이 된 후 더욱 희색과 활기에 차보였다.
몇마디 이야기를 나눌 때 옆문으로 직원이 들어왔다.
"오늘 김 부회장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라며 잠시 멈추고 방금 들어온 직원을 다시 봤다.
"이 사람은 최근 KAL에서 채용한 정하용 박사인데,프랑스어를 잘 한다오.이번 한.프랑스 회의에서 정 박사에게 통역을 부탁할까 해서"
필자는 "왜 KAL의 인사문제를 나에게 상의하나"하며 순간 의아하게 생각했다.
조 회장은 "정 박사는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으나,지난 70년 크리스마스대 사면됐소.그런데 아직 해외 여행이 자유스럽지 못하오"라고 말했다.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 발표에 의하면 "동백림 사건"은 북한이 독일.프랑스 등에 있던 우리 유학생을 조직적으로 포섭한데서 비롯됐다고 했다.
교포 음악가 윤이상씨를 비롯해 유학생 관련자가 1백94명이나 되고,이중 정하룡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정하룡군은 전경련 추천으로 파리에 동행하게 됐다.
전경련은 한.프랑스 경제협력 합동회의에 대해 각별한 열성과 주의를 기울였다.
이 회의는 유럽에서 열리는 한국과의 첫번째 민간협력회의였다.
한.프랑스 합동회의 귀추에 따라 인접한 나라들,즉 영국.독일 등은 우리와의 경협수위를 결정하려 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전경련이 의도했던 것은 <>프랑스를 통한 유럽시장 개척,<>프랑스의 항공기제작,정밀기계,디자인산업 등과의 제휴 <>아프리카 등 불어권 지역에서의 건설.엔지니어링 공동진출 등이었다.
이밖에 외자유치 창구로서의 합작금융기구 설립 구상과 더불어 합작투자 촉진에도 역점을 뒀다.
이러한 한.프랑스 경제합동회의의 "의제,절차,공동커뮤니케" 등은 그 후 유럽 여러 나라들과 설립한 10여개 경제협력위원회의 원형이 됐다.
이에 따라 1974년 3월24~25일 파리에서 제1차 한.프랑스 합동회의,이어 1975년 3월25일 역시 파리에서 제2차 회의,그리고 1976년 9월15일 서울에서 제3차 합동회의가 개최됐다.
불어권 지역 공동진출을 위한 "건설분과 특별위원회"신설,프랑스정부 초청 장학생의 전경련 선발,그리고 경영연수생 30명 파견 등을 추진키로 했다.
양국간 인사교류도 급속히 늘어났다.
75년에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동생인 올리비에 지스카르 데스텡이 구주경제센터 회장자격으로 방한했다.
이어 레이몽 바르 통산장관,프랑스 행정연구원장도 서울에 와 문화교류를 활발하게 진척시켰다.
파리나 유럽에는 구주공동체 등 국제협력기구가 여러개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대한국경제협의체(IECOK)회의 등 한국정부 대표가 참가하는 국제회의 개최시기에 민간합동회의도 열기로 했다.
민간 경제합동회의에 한.프랑스 양국정부 장관 등 고위관계자들이 함께 참석,양국협력을 촉진시키는데 힘을 실어줬다.
이는 오늘날 대통령 국빈 방문때 경제인 동행이라는 관례(?)를 낳게 했다.
남덕우,신현확 부총리 등은 관.민합동사절단 단장으로 많은 수고와 성과를 함께 하신 분들이다.
<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