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곧 한 질의 책"이라고 말씀하신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원로 화가 백영수(78)씨의 회상록 "성냥갑 속의 메시지"(문학사상사)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만 권의 책으로도 다 잴 수 없는 우리들 삶의 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어가듯 똑같은 책갈피로 이어지지 않는 게 운명이니까요.

이 책에는 궁핍한 시대의 예술가들 얘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나이로 팔순이 다 된 백영수 화백은 파리와 밀라노 등 유럽에서 1백여 차례나 초대전을 가진 분이지요.

스물네살 때 조선대에 국내 최초의 미술과를 설립하고 이화여대 미술과도 신설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이야기보다 다른 사람들 얘기를 더 많이 들려줍니다.

빛바랜 흑백사진과 글씨 속에 가난한 예술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군요.

따뜻한 녹색과 둥근 얼굴로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분의 그림처럼 정답습니다.

책장을 넘기면 해방과 전쟁의 굴곡진 현대사를 헤쳐오면서 빛나는 예술혼을 다듬어온 사람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밉니다.

담뱃갑 은박지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며 막막한 시절을 견디던 화가 이중섭도 만날 수 있지요.

나무 탁자 위로 서걱대며 지나가는 연필 소리가 들립니다.

피난처인 부산 금강 다방의 풍경도 선명하네요.

화가에게 가장 귀하다는 흰색 유화물감.

아끼고 아껴 쓰던 그걸 조심스레 내밀며 "백형! 나 돈 쪼금만 줘"라던 이중섭의 심중은 어땠을까요.

차 몇잔 값을 구한 그는 낡은 고무신을 신은 맨발의 여인에게 그 돈을 건네줍니다.

그녀는 가난한 한국 화가와 결혼해 한번도 따뜻한 밥 한 끼 먹어보지 못한 일본인 아내였죠.

빨간 색으로 소를 그렸다가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끌려가 곤욕을 치렀던 화가 장욱진의 애환도 아릿하게 묻어납니다.

시인의 꿈을 안고 상경한 서정주가 고향 사람을 만나자 급히 옷고름을 뜯어 아내에게 편지를 써 보내던 사연 또한 눈물겹습니다.

김기창 김환기 화백과 박목월 조지훈 김동리 등 문인들,영화감독 신상옥과 최은희까지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그 곁에 함께 있군요.

그들의 웃음 뒤로 커튼처럼 흘러내리는 외로움이 보입니다.

최근에 읽은 "보엠"(전3권,이끌리오)에서도 피카소를 비롯한 파리 예술인들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새삼 느꼈지요.

지난 시절에 비해 경제적인 풍요는 늘었지만 마음은 더 가난해진 요즘,그들의 아픔과 곡진함을 더욱 그리워하게 됩니다.

줄광대가 몸이 쏠리는 반대쪽으로 쥘부채를 펴듯 우리 영혼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도 그들의 고귀한 예술혼이지요.

"성냥갑"은 가볍지만 그 속에는 천근의 무게가 담겨 있습니다.

귀한 책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겸허히 읽으면서 다시금 자신을 돌아봅니다.

먼 훗날 우리들은 어떤 무게의 책으로 남을까요.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