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던 누군가의 말이 그들에게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다.
여러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나 동물세계의 장면들도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를 매혹하는 프로그램중 하나다.
아무래도 우리는 너무 속고 산다.
TV앞에 앉아서 아프리카의 실제 삶을 보고 있다고 믿는 것만 해도 그렇다.
생활이 나를 속일 때 덜 슬퍼하려면 남의 일들을 통해서 미리 속는 일을 연습해 봐야 한다.
문명이 발달할 수록 속임수도 늘어나니까.
그래서 미학은 속임수다.
"연극하지마,소설 같은 얘기네,영화 속에서 그렇다니까..."
이런 말들은 모두 미학이 실제 삶과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현실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이중성 사이에서 헤매는 게 이야기 꾸미기다.
일본문화 3차 개방이란 말이 어딘지 으스스하게 들린다.
농산물 개방이니,우르과이라운드니 하는 낱말과 IMF가 한데 어우러져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어 "3차"라는 낱말이 마치 운동 경기의 마지막 라운드인 것처럼 우리를 위협한다.
시합을 하다말고 그만 둘 수도 없고,그냥 바라 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개방은 아직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빼앗는다는 느낌만 준다.
그래서 찬반론을 펼쳐보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찬반론"이란 하나의 의견보다 낫지만,거기서 멈추면 문제의 초점을 빗겨가 버리기 쉽다.
그보다는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인가 점검하고 해결해보려는 게 낫지 않을까.
그동안 우리는 문학의 해,영화의 해,애니메이션의 해 등을 설정하여 그 분야에 집중 지원을 해왔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소설도 영화도 그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장르가 다를지라도 이들은 모두 이야기 꾸미기이고,또 이야기 꾸미기는 우리 문화의 전반적인 수준과 동떨어질 수 없다.
이 말은 우리의 문화수준을 얕보아서가 아니라 이들이 모두 한 꾸러미이고 전반적인 취약점을 따지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뜻이다.
원래 예술의 독창성이란 고통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다.
그런데 장르별 지원은 마치 이들이 별개라는 인식을 주었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참 많이 속고 산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야기를 꾸밀 때는 이게 전혀 힘을 못 쓴다.
좋은 단편은 많은데,좋은 장편이 드문 이유도 옹골차게 끝까지 속이지를 못하고 중간쯤 가서 그만 길을 잃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그렇다.
잘된 영화라고 상을 받은 경우도 다 보고 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것인지 모호해진다.
주제가 선명치 못한 것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서로 얽히면서 하나의 중심 주제를 향해 엮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작품이 주는 감동도 약해진다.
애니메이션 역시 그림도 잘 그려야하지만 우선 이야기의 기본 뼈대가 서 있어야 한다.
골격이 튼튼하지 못하면 건물이고 다리고 무너져 앉기 마련이다.
캐릭터라는 것도 이야기를 잘 꾸미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이지 그것만이 톡 튀어 나올 수는 없다.
관객을 감쪽같이 속이고도 갈채를 받는 게 예술이다.
현실의 긍정과 아픔은 역설을 통해 와야하기 때문이다.
플롯(Plot)은 원래 속임수란 뜻이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이것에 딱 맞는 단어가 없다.
"구성"이라고 바꾸어보지만 어쩐지 멋지게 속이라는 뜻은 빠진 것 같다.
일본 문화와의 전쟁은 세계 문화와의 전쟁이고 그것은 우리문화의 전반적 수준에 대한 배려를 요구한다.
패러다임의 공유도 중요하고,또 그것을 고유한 상황과 결합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방식이 급하다.
좋은 플롯 짜기는 오늘날의 미학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갑옷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권택영 문학평론가 rookie@unitel.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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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
<>경희대 사대 영문과 졸업
<>미국 네브래스카주립대 영문학 박사
<>경희대 영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