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밸리] (성공스토리) 이인동 <한국인식기술 사장>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벤처기업 경영자는 넘치는 패기가 무모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지난해 정보문화대상을 수상하고 금년 매출목표 60억원의 중견 벤처인(주)한국인식기술의 이인동 사장(41).그는 대덕밸리에서 창업한 뒤 7년가까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성장한 대표적 벤처기업인이다.
이 사장은 요즘 벤처를 창업하는 후배들을 만날 때면 "기술력에 대한 과신은 금물"이라고 조언한다.
기술은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을 될수 없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연구개발을 소홀히 했을 때 되돌아오는 파장을 지난 7년동안 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던 결과이기도 하다.
벤처라는 용어조차 생겨나기 이전인 지난93년 9월.그는 벌써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았다.
KIST 연구원이라는 그럴듯한 직업을 버리고 창업의 가시밭길로 뛰어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론에 머무는 실험실 기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내린 결단이었다.
당시에는 말이 좋아 창업이지 혼자 사무실 한칸을 얻어 개발에만 몰두하는 "나홀로 회사"였다.
초창기 사업화한 아이템은 문자인식기술이었다.
스캐너에 문서를 넣으면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아도 텍스트를 인식,편집할수 있도록 한 기술이었다.
그는 "창업당시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의 기술수준 역시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어 주위에서 무모한 짓이라고 말렸습니다. 하지만 외국기술보다 앞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창업한 그해 연말께 문자인식기술의 상품화가 이루어지자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시판 1년만에 2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사장은 처음 출시한 제품으로 회사의 토대를 탄탄하게 닦을만한 자금을 모은 행운아였다고 소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다.
한정된 분야에 쓰이는 제품이어서 수요층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에도 그의 사업은 고속성장을 질주했다.
매출도 꾸준히 증가해 직원들에게도 매년 30%씩 임금을 인상해줬다.
이 사장은 상 복도 많은 편이다.
지난94년 한국소프트웨어공모전에서 아이디어상을 받았고 95년에는 장영실상과 신한국인상을 수상했다.
신기술인정 KT마크도 획득했다.
사업이 급성장하자 지난97년 연구인력을 중심으로 회사인력을 20여명 충원했다.
또 서울지사를 개설하면서 10여명의 직원을 새로 채용했다.
하지만 잘 나갈것 같았던 이 회사도 IMF라는 재난을 피해가지는 못하고 대량 해고라는 마지막 수단을 써야만했다.
이 사장은 잘 풀릴 것이라는 막연한 감만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게 화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신제품 개발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렵사리 출시한 새 버전도 버그가 발생해 시판 6개월동안은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는데 회사역량을 쏟아야만 했다.
엔지니어 출신 초보 경영자의 시장예측 실패가 가져다 준 위기였다.
인원감축이라는 아픔을 맛 본 이사장은 이때부터 다시 연구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신제품도 6개월 단위로 발표해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입맛을 맞추기 시작했다.
또 스톡옵션과 능력위주의 인사,성과급 연봉제 등 회사의 내부 체계도 내실있게 다져갔다.
그 결과 기술력은 더욱 탄탄해졌다.
한글텍스트를 인식하는 제품은 영어 등 14개 언어에 대한 문자인식과 이미지 편집을 할 수있는 다기능 제품으로 발전했다.
소비층도 넓어져 지난해에는 1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60억원의 판매고를 거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사장은 "벤처의 성공조건중 기술력이 차지하는 부분은 10%미만"이라며 "엔지니어적인 고집과 기술력에 대한 과신에서 벗어나 영업 능력을 키워 나가는 게 바로 벤처성공의 관건"이라고 다시한번 강조했다.
지난해 정보문화대상을 수상하고 금년 매출목표 60억원의 중견 벤처인(주)한국인식기술의 이인동 사장(41).그는 대덕밸리에서 창업한 뒤 7년가까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성장한 대표적 벤처기업인이다.
이 사장은 요즘 벤처를 창업하는 후배들을 만날 때면 "기술력에 대한 과신은 금물"이라고 조언한다.
기술은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을 될수 없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연구개발을 소홀히 했을 때 되돌아오는 파장을 지난 7년동안 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던 결과이기도 하다.
벤처라는 용어조차 생겨나기 이전인 지난93년 9월.그는 벌써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았다.
KIST 연구원이라는 그럴듯한 직업을 버리고 창업의 가시밭길로 뛰어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론에 머무는 실험실 기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내린 결단이었다.
당시에는 말이 좋아 창업이지 혼자 사무실 한칸을 얻어 개발에만 몰두하는 "나홀로 회사"였다.
초창기 사업화한 아이템은 문자인식기술이었다.
스캐너에 문서를 넣으면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아도 텍스트를 인식,편집할수 있도록 한 기술이었다.
그는 "창업당시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의 기술수준 역시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어 주위에서 무모한 짓이라고 말렸습니다. 하지만 외국기술보다 앞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창업한 그해 연말께 문자인식기술의 상품화가 이루어지자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시판 1년만에 2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사장은 처음 출시한 제품으로 회사의 토대를 탄탄하게 닦을만한 자금을 모은 행운아였다고 소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다.
한정된 분야에 쓰이는 제품이어서 수요층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에도 그의 사업은 고속성장을 질주했다.
매출도 꾸준히 증가해 직원들에게도 매년 30%씩 임금을 인상해줬다.
이 사장은 상 복도 많은 편이다.
지난94년 한국소프트웨어공모전에서 아이디어상을 받았고 95년에는 장영실상과 신한국인상을 수상했다.
신기술인정 KT마크도 획득했다.
사업이 급성장하자 지난97년 연구인력을 중심으로 회사인력을 20여명 충원했다.
또 서울지사를 개설하면서 10여명의 직원을 새로 채용했다.
하지만 잘 나갈것 같았던 이 회사도 IMF라는 재난을 피해가지는 못하고 대량 해고라는 마지막 수단을 써야만했다.
이 사장은 잘 풀릴 것이라는 막연한 감만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게 화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신제품 개발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렵사리 출시한 새 버전도 버그가 발생해 시판 6개월동안은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는데 회사역량을 쏟아야만 했다.
엔지니어 출신 초보 경영자의 시장예측 실패가 가져다 준 위기였다.
인원감축이라는 아픔을 맛 본 이사장은 이때부터 다시 연구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신제품도 6개월 단위로 발표해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입맛을 맞추기 시작했다.
또 스톡옵션과 능력위주의 인사,성과급 연봉제 등 회사의 내부 체계도 내실있게 다져갔다.
그 결과 기술력은 더욱 탄탄해졌다.
한글텍스트를 인식하는 제품은 영어 등 14개 언어에 대한 문자인식과 이미지 편집을 할 수있는 다기능 제품으로 발전했다.
소비층도 넓어져 지난해에는 1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60억원의 판매고를 거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사장은 "벤처의 성공조건중 기술력이 차지하는 부분은 10%미만"이라며 "엔지니어적인 고집과 기술력에 대한 과신에서 벗어나 영업 능력을 키워 나가는 게 바로 벤처성공의 관건"이라고 다시한번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