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은행 주총 시즌을 앞둔 때의 일이다.

주택은행 임직원들은 김정태 행장이 보낸 전자우편(e메일)을 열어보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떠한 인사청탁도 거부하겠다"는 김 행장의 편지를 읽고서였다.

김 행장은 "정.관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전화하거나 직접 방문해 임직원의 승진과 부서이동에 관한 청탁을 해오고 있어 분노마저 느낀다"고 적었다.

인사청탁이 비일비재한 것은 비단 주택은행만의 사례가 아니다.

은행 인사철만 되면 금융감독위원회나 재정경제부 등 금융당국 관계자들은 밀려드는 청탁으로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다.

언론사나 관련 기업에까지 손을 뻗친다.

각 은행마다 "누구는 청와대에 줄을 댔다" "모 국회의원과 친인척관계다"라는 온갖 소문이 난무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소문이 돌던 인물이 임원자리에 오르는게 현실이다.

외부에 인사청탁하는 것은 결국 은행의 경영자율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관치금융을 거부한다면서도 은행원들이 스스로 관치금융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은행의 핵심업무중 하나인 여신과 관련해서도 은행원들의 도덕적해이(모럴해저드)는 적지 않다.

한보 비리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던 지난 97년.

세 명의 금융인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철수 전 제일은행장은 정치권과 한보그룹의 청탁을 받고 대출한 혐의로 결국 형사처벌을 받았다.

다른 한 명은 산업은행 심사부에 근무했던 조성철 대리(현 영업2부 차장)다.

대출조건이 안된다고 끝까지 서류서명을 거부했던 평범한 은행원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보대출건으로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제일은행의 P상무가 금융인의 기억에 남아 있다.

세 명의 금융인을 보면 관치금융이 어떻게 은행권에 뿌리를 내리는지 명확히 드러난다.

대출이든 자금지원이든 요건이 안된다고 실무자가 반대하더라도 청탁을 받은 "분"이 결정하면 그만이다.

중간관리자는 향후 자신의 미래상을 그리며 두 입장 사이에서 갈등할 뿐이다.

"고뇌만 할 뿐 용기는 없는" 은행 문화가 관치금융의 온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관치금융은 관(官)의 변화만으로는 청산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은행의 변신도 동시에 요구된다.

손뼉도 두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관치금융 역시 근본적으로는 관과 은행간 야합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과거 관치에 순응하면 그만큼 얻는 것도 많았다.

은행은 정책자금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이익을 얻기도 했고 개인도 떡고물을 챙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은행이 관치에 순응해서 얻는 이익보다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수 있는 시장중심의 무한경쟁시대다.

한국금융연구원 지동현 연구위원은 "개인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조직을 위해 희생하는 문화가 금융회사에 필요하다"며 "이런 희생이 쌓이면 외부의 압력도 약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이 주인이자 행장인 제일은행에는 관치가 파고들 틈이 없어지고 있는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준현 기자 kimjh@hankyung.com